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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와 아이돌의 매력적인 하이브리드

이승윤 세 번째 앨범의 선(先) 공개곡 《폭포》는 6분이 넘는 대곡이다. 곡이 시작되면 근래에 제도권의 음악에서는 보기 힘든 낯선 전개를 만나게 된다. K팝을 비롯해 최근의 음악들이 자극적인 코러스 파트를 위해 최대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발걸음을 옮겨가는 것에 비하면 사뭇 고전적인 접근이다.

어쩌면 정직하다고나 할까. 이 곡은 음악이 풀어낼 이야기를 위해 청자를 충분히 준비시키고, 감정적으로 예열시키며, 그리고 마침내 궁극의 후렴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끌어내는 과정에 조급하지 않다. 얽매이지 않는 실험성과 자유로운 시도가 존재의 이유인 인디음악조차도 K팝적인 작법을 닮아가는 요즘, 실로 보기 드물게 진득한 태도다. 아니나 다를까, 이 앨범이 내세우는 기치 역시 한번쯤 익숙한 것에 반기를 들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거스른다는 의미의 ‘역성’이다.

또 다른 타이틀곡인 《폭죽타임》에서도 비슷한 뉘앙스가 읽힌다. 확산과 폭발의 이미지가 일품인 이 곡의 에너지 넘치는 연주와 목소리에는 어둠을 거부하는 승리감과 환희 이상의 비장함이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단순히 감각적인 음악과는 다른 어떤 의지와 방향성, 하지만 K팝 아이돌 못지않은 팬덤을 거느린 또 하나의 아이돌인 이승윤의 음악인 것을 감안하면 이 같은 접근법은 더더욱 독특하게 와닿는다.

데이식스의 역주행과 양수겸장

물론 음악가 입장에서 이 같은 음악성을 표출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장르의 선택지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록만큼 이 같은 메시지와 태도를 위해 최적화된 장르는 전에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승윤에게 그것은 브릿팝을 비롯한 브리티시록 혹은 그 상위 개념인 얼터너티브록이었지만 그게 무엇이든 상관은 없다. 착시일지 모르지만 최근 몇 년간 인디신을 중심으로 눈에 띄는 록밴드가 많다. 쏜애플, 실리카겔, 세이수미, 웨이브 투 어스(wave to earth)…. 게다가 이들은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관심을 얻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흐름이 인디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고’와 ‘록(혹은 밴드)’은 현재 K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다. 록은 정말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군백기(병역으로 인한 활동 공백기)’ 동안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와 《예뻤어》 등을 차트에 올리며 역주행의 신화를 쓴 데이식스는 분명 아이돌이다. 여타 아이돌과 똑같이 연습생 생활을 거쳤고, 팬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나 팬덤의 성향 역시 기존 아이돌들과 큰 차이가 없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이들이 록이라는 장르에 기반을 두고 밴드 플레이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언뜻 생각하면 댄스가 들어갈 자리에 악기 연주가 채워진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K팝은 그 핵심적 미학이 비주얼을 내세운 ‘퍼포먼스’라고 말할 정도로 춤과 무대의 비중이 큰 음악이다. 그 난도 자체도 높아서, 과거 백업 댄서들만 소화 가능했던 동작들을 고강도 훈련을 통해 최대한 가깝게 구현해 내는 상황이다. 가벼운 ‘안무’를 곁들인 보컬그룹의 성격이 강했던 서구의 보이밴드나 춤 자체의 비중이 극히 작았던 걸그룹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지점도 이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밴드는 K팝 아이돌이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를 봉인한 채 시장에서 경쟁하는 셈이고,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를 어필하고 인정받는 데까지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린다.

2015년 9월 데뷔한 데이식스는 9년 만에 전성기 아닌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들이 갑자기 더 매력적인 최신곡을 들고나와서일까? ‘밴드’나 ‘록’이라는 포맷이 낯선 K팝에서 그들의 장점과 매력이 뭔지를 기존의 K팝 팬들에게 납득시키는 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뜻하지 않은 성과도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이 특유의 매니악한 감수성과 복잡한 세계관 때문에 그들만의 리그에서 경쟁한다는 느낌을 주는 데 반해 데이식스는 지난 9년의 세월을 통해 이제는 희미해진 개념인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물론 데이식스의 이 같은 성공이 ‘록’이라는 장르의 우월함을 증명한다고 보진 않는다. 이제는 철 지난 ‘록 우월주의’의 망령을 꺼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록이라는 장르가 가진 본질적인 특징과 매력, 특히 밴드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장점은 분명히 있고 이것이 K팝이 가진 아이돌 문화와 성공적으로 결합한 사례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록 밴드는 어떻게 K팝의 유기성을 만드나

밴드 포맷의 록 음악은 음악과 아티스트의 관계를 상대적으로 유기적으로 만들어주는 경향을 띤다. 밴드는 직접 악기를 연주하면서 합주를 통해 음악과 무대를 준비하게 마련인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동 창작의 프로세스가 탄생한다. 가사 한 줄, 단어 선택 하나, 혹은 멜로디나 연주의 진행 하나하나가 밴드 플레이의 결과와 맞닿아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퍼포머와 창작자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가령 데이식스의 모든 곡은 전문 프로듀서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멤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억지스럽지 않은 ‘아티스트십’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듣는 입장에서는 가사나 멜로디가 그들의 연주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고 느끼게 되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유기적인 일체감이 아티스트를 조금 더 가깝고 인간적인 존재로 느끼게 만든다.

아이돌 밴드의 포맷을 가장 크게 유행시켰던 씨엔블루나 밴드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루시 같은 팀 역시 이 같은 유기성의 장점을 잘 보여준다. 음악감독인 정용화나 조원상의 전반적인 프로듀싱 아래 이들의 음악적 방향과 색이 모양을 갖춘다. 기획사는 이들을 모으고 훈련시키고 혹은 관리하지만 큰 틀에서 음악의 주도권은 회사보다는 밴드에 있다.

음악적 재능을 차치하고라도 만약 이들이 퍼포먼스 위주의 보이밴드였다면 그룹의 음악적 색채보다는 트렌디한 사운드가 중요해질 것이고 당연히 이들보다 훨씬 더 트렌드에 밝은 전문 작곡가나 편곡가의 역할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밴드형 아이돌은 K팝이 그간 받아온 ‘공장형’의 이미지를 희석할 수 있는 중요한 방편이기도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아이돌’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최초의 아티스트는 록 밴드인 비틀스였다. 60년대 중반 이후 반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기 전, 그들은 귀여운 외모와 매력적인 무대 매너로 소녀들을 몰고 다니는 아이돌 그룹이었다.

최근 페스티벌 참가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 걸밴드 QWER도 연주 실력을 떠나 그 본질에서는 밴드와 아이돌의 매력적인 하이브리드를 정확히 보여준다. 록의 출발이었던 로큰롤은 원래 당시 유행하는 모든 ‘힙한’ 젊음의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의 본질이 힙하고 젊은 청춘의 서사라면 그건 K팝 아이돌의 지향점과도 다르지 않다. K팝의 밴드 열풍이 단순히 복고를 틈탄 일시적 유행이 아닐 거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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