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강렬했던 브릿팝 대전의 추억
199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영국 밴드 오아시스가 재결성 투어 소식을 알렸다. 음악팬으로서는 소위 ‘피 끓는’ 뉴스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오랜 팬이든 아니든, 1990년대 그 무모하고 심지어 유치했던 ‘브릿팝 전투’에서 그들을 지지했거나 혹은 반대편에 서거나에 상관없이 이미 그들은 보편적 역사가 되었고 추억의 일부가 되었다. 콘서트 티켓은 열 시간 만에 매진되었고, ‘되팔이’로 인해 암표값이 1000만원을 넘어서고 있다는, 그래서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에 나선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불화의 아이콘인 리암-갤러거 두 형제가 과연 투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이들을 잘 아는 팬들 간에 장난 섞인 예측들이 오가고, 공연에 더해 오랜만에 새 앨범을 내줄지에 대한 희망 섞인 전망들도 오간다.
확실한 건 오아시스는 그 정도의 ‘하이프’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밴드라는 사실이며, 이 같은 열풍이 그저 한 시절의 추억과 향수에 기댄 무언가라 할지라도 오랜만에 ‘브릿팝’이라는 단어를 기사에서 접하는 그 낯선 풍경과 함께 스타디움과 아레나를 메우게 될 《돈 룩 백 인 앵거(Don’t Look Back in Anger)》 의 떼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다는 걸 어찌 숨길 수 있을 것인가. 음악계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논란’이 아닌 진짜 ‘화제’가 그래서 반가운 것이다.
영국판 얼터너티브 운동, 브릿팝
그런데 오아시스라는 그룹과 함께 따라다니는 용어 중에 ‘브릿팝’이라는 장르가 있다. 음악에 대해 그다지 박식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하게 친숙한 단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영국에서 시작되어 세계로 뻗어나간, 놀랍도록 짧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던 한 시대의 ‘현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브릿팝을 음악 장르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사가들에게는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다. 유행의 실체가 있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분명하고 그것을 떠받든 대중이나 ‘신’이라고 부르는 배경이 있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음악적 특징이나 스타일을 명쾌하게 설명할 만한 근거가 다소 희박하다는 것은 생각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토론 거리를 제공하는 부분이다. 정작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과거 로큰롤이라는 말이 그랬던 것처럼 브릿팝 역시 매우 매력적이고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이자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애매모호한 특징을 가진 브릿팝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영국 사이에 존재하는 음악적 영향과 긴장관계를 역사적인 측면에서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역사는 저 옛날 비틀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에 현대적 대중음악 산업이라는 것이 사실상 전무했던 1950년대 중반, 미국발(發) 로큰롤 열풍은 잠자던 영국의 록 DNA를 일깨운 대사건이었다. 반항적인 젊은 기세로 가득했던 비틀스 역시 로큰롤이라는 새로운 음악에 헌신하고자 하는, 차세대 엘비스를 꿈꾸는 수많은 이 중 하나였다.
비틀스를 필두로 미국 로큰롤 음악에 취한 영국 젊은이들의 미국 정복이 시작되었고 역사는 이를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 명명한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긴 했지만 섬나라 영국의 대중음악은 그 원조이자 뿌리인 미국과는 늘 그 결을 조금은 달리했다. 로컬리티와 인종성이 강조된 리듬과 파워 중심의 호방한 미국 음악에 반해 영국 음악은 아기자기하고 멜로디가 풍부했으며 그 안에 특유의 (노동)계급적 정체성과 혼종적 쾌활함이 있었다.
비틀스와 롤링스톤스를 필두로 영국은 레드제플린, 딥퍼플, 핑크플로이드, 퀸 등 록 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들을 연이어 내놓기 시작한다. 1970년대 록의 전성시대만 놓고 보면 영국의 음악적 역량은 오히려 미국을 능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펑크의 시작을 알린 건 미국이었지만 이는 영국으로 건너가 섹스피스톨스, 더클래시 등을 통해 더 파괴적인 음악이 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 초, 영국의 풍요로운 록 음악 유산에 다양한 팝 음악과 댄스 음악의 영향이 뒤섞인 유쾌하고 장난스럽고 발칙한 록 음악이 영국에서 꿈틀대 삐져나오니 그것이 바로 오아시스라는 위대한 밴드를 탄생시킨 브릿팝이다.
브릿팝의 핵심적인 정신은 너바나, 펄잼 등을 비롯한 미국 얼터너티브 음악에 반기를 드는 ‘반-그런지’였다. 오아시스나 블러의 멤버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 얼터너티브 음악, 그중에서도 시애틀에서 탄생한 ‘그런지’ 음악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했을 뿐 아니라 이것을 일종의 국가대항전과 같은 내러티브로 활용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 같은 영국 록 음악의 민족주의적 프라이드와 반-얼터너티브의 태도(하지만 정작 음악적인 모든 부분에서 유사했던)는 또 한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대한 기대감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전성기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짧았다.
브릿팝 전투의 진짜 승자, 짧았던 황금기
브릿팝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고 흥미로웠던 순간은 바로 오아시스와 블러가 정면으로 맞붙은 1995년의 ‘브릿팝 전투(The Battle of Britpop)’다. 이미 세 번째 정규 앨범인 명반 Parklife(1994)를 내놓으며 브릿팝 전성시대의 포문을 연 런던 출신 밴드 블러에 대항해 맨체스터 출신의 오아시스가 데뷔하자 언론들은 이 둘을 비틀스-롤링스톤스 이후 최대의 라이벌로 부각시키기에 이른다. 이 전투는 단기적으로는 블러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1995년에 블러의 소속사인 EMI가 새 싱글 ‘컨트리 하우스(Country House)’의 발매일까지 조정하면서 오아시스의 신곡 《롤 위드 잇(Roll with It)》과 맞대결을 유도해 차트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쟁의 승자는 오아시스였다. 전작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한 블러의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에 비해 오아시스는 브릿팝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인 ‘왓츠 더 스토리 모닝 글로리?(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를 내놓았고, 이 앨범을 통해 영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록그룹으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특히 블러에 비해 좀 더 야성적인 록밴드의 정체성이 강했던 오아시스는 록의 본고장인 미국 시장의 취향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놀랍게도 브릿팝의 전성기는 길게 잡아야 3년 남짓이었다. 비틀스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그룹으로 꼽히는 라디오 헤드가 등장해 록의 사운드 자체를 혁명적으로 뒤바꾼 것도 있겠지만, 블러와 오아시스 역시 브릿팝이라는 카테고리에 싫증을 느끼고 더 넓은 음악의 바다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콜드플레이, 이매진드래건스, 심지어 해리 스타일스에 이르기까지 브릿팝에서 파생된 영국 음악의 전통은 계속되고 있으며, 동시대를 넘어 혁오, 이승윤 같은 K팝·K록 뮤지션들에 의해서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때마침 들려온 오아시스의 재결성 소식과 열광적인 음악팬들의 반응은 대중음악이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영속적인 사조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