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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의사는 12시간 맞교대로 번아웃…전공의·의대생 복귀는 요원
응급실은 마비 상태, 의료체계는 붕괴 조짐

“구멍 난 강둑을 손바닥으로 막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 의료인은 무너지기 시작한 응급의료체계를 ‘구멍 난 강둑’으로 표현했다. 전공의가 떠난 병원에서 전문의들이 겨우 버티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방 병원에서 시작된 응급실 운영 제한은 최근 서울대병원·세브란스병원·서울성모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 등 내로라 하는 대형병원으로 도미노처럼 번졌다. 충북대병원에 이어 이대목동병원도 일주일에 이틀 응급실 셧다운(운영 중단)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경원 용인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대한응급의학회 공보이사)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응급실 뺑뺑이’ 사례가 최근 있었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외상은 응급실에서 치료받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듀티(duty·근무시간)에 전문의 2명이 있는 병원은 드물고 대부분 1명이 담당하므로 생명과 직결된 중증 환자만 진료하기에도 벅차다. 이를 해결할 사회적·정치적 역량이 안 된다는 현실이 더 안타깝다”고 말했다. 

응급실 의사는 부족한데 응급실을 찾는 환자는 코로나19와 온열질환 등으로 늘어났다. 보건복지부는 8월 셋째 주 응급실 환자가 평시 대비 111% 수준이라고 밝혔다. 전공이 없이 7개월째 응급실을 지키고 있는 의사들은 번아웃(소진) 상태를 견디다 못해 휴직이나 사직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경원 교수는 “용인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서도 의사 12명 중 3명이 사직했는데 이는 사정이 좋은 편이다. 응급실 의사가 5명이더라도 병가나 휴가 등으로 빠지면 나머지 사람들은 더 힘들어진다. 성인 담당 1명 그리고 소아 담당 1명씩 12시간 또는 24시간 맞교대로 근무한다. 경증 환자는 다른 병원으로 안내한다고 해도 생명이 위급한 중증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다. 이런 중증 환자를 보는 의사가 1명인 병원이 대부분이다.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한계를 맞은 전문의가 휴직이나 사직하고 있다. 이제는 사명감으로 버티기에도 힘든 한계가 왔다. 나도 밤샘 진료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는데 다시 진료를 봐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 응급실 병상 포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 응급실 병상 포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응급실 환자 챙기기 힘든 비응급의학과 문제 더 심각”

지난해 말 기준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는 1418명이었고 현재 1502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전공의 약 500명이 병원을 떠나면서 이전과 동일한 진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병원은 의사를 구하려고 애를 쓰지만 여의치 않다. 서울의 한 대형 의료기관은 응급의학과 전문의 채용 공고를 내면서 연봉 4억원을 제시했으나 지원하는 전문의가 없다. 지방 병원은 더 심하다. 강원도의 한 의료기관을 퇴사한 응급의학과 전문의 2명이 모두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이직했다. 수도권 병원으로 이직하는 의사가 생기면서 지방 병원 응급의료체계는 마비된 셈이다. 

정부는 응급의료체계 마비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는 “일시적으로 운영이 제한됐던 응급실도 신속히 정상 진료를 개시했거나 향후 정상화 예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응급의료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를 높이고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의 전담 인력에 대한 인건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또 경증 환자가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를 찾을 경우 본인 부담분을 기존 50~60%에서 90%로 상향하기로 했다. 경증 환자를 동네 병의원으로 분산하려는 조치다. 이경원 교수는 “한시적으로나마 응급실 의료 수가를 올린 것은 남아있는 의사들을 위한 최소한의 보상이다. 그런데 낮은 응급실 의료 수가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고 정부가 모르지도 않는다. 이참에 응급실 의료 수가를 상시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병원마다 응급실 앞에 ‘정형외과 응급 수술 불가’ ‘안과 응급 수술 불가’ ‘비뇨기과 진료 불가’ 등 진료 제한 안내판을 붙였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중증 환자에 대한 응급 진료를 마치면 해당 진료과 전문의는 그 환자를 입원시켜 진료를 이어간다. 그러나 이런 의료체계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의료 현장의 목소리다.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언론에서 응급실 상황만 보도하는데 비단 응급의학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더 심각하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중증 환자를 응급으로 진료한 후 해당 진료과 전문의에게 보낸다. 가령 심혈관 문제라면 심장내과 의사에게 전문 진료를 맡긴다. 그런데 심장내과도 전공의가 없어 응급실 환자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 소아과는 아예 응급실 콜(call·호출)을 받지 않겠다고 할 정도다. 응급의학과뿐만 아니라 비응급의학과 의사들 특히 젊은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고 있다. 응급실 업무 강도는 더 세지고 그러다가 소송에도 휘말린다. 정부는 의사를 마치 돈만 밝히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데 이런 현장 상황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지적했다. 

응급실 의사들에게 소송은 오랜 고질병이다. 이경원 교수는 “응급의학과는 중증 환자를 보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한 진료과다. 그래서 경증 환자를 동네 병의원으로 안내하기라도 하면 진료 거부 등으로 소송에 휘말린다. 폭언과 폭행을 당해도 진료를 거부할 수 없게 한 응급의료법 6조는 의사들에게 족쇄와 같다. 사명감으로 응급실을 지킨 의사도 이런 심리적 부담을 견디다 못해 병원을 떠난다. 응급치료에서 형사소송은 면책돼야 하고 민사소송도 손해배상액 최고 한도를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8월22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응급실 앞에 경증환자 진료 불가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 연합뉴스
8월22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응급실 앞에 경증환자 진료 불가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 연합뉴스

“해결될 전망이 없으니 희망도 없다”

마비된 응급실에 이어 전체 의료체계마저 붕괴할 조짐을 보이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힘든 상황을 버티고 있는 시니어 의사들이 사직 또는 퇴직 등으로 병원을 떠난 후 대를 이을 젊은 의사들이 없다. 병원을 떠난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이 철회됐으나 8월22일 기준 211개 수련병원의 전공의 출근율은 8.8%이고 인턴 출근율도 3.7%밖에 되지 않는다. 의대 상황은 더 참혹하다. 대학은 추가 등록 기간을 두거나 이수하지 못한 과목에 F학점(유급)을 주지 않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만 의대생 출석률은 2.7%에 불과하다. 

한 의대 교수는 “전공의가 복귀해도 추가 수련 과정을 몇 개월 거쳐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전문의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 F학점 의대생을 진급시킨다고 하니 의대생들 사이에서도 말이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통령이나 여당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 이런 현상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라고 지적했다. 또 강희철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상황이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 같다. 사명감이나 애국심을 강조했던 시대에 시니어 의사들은 산업역군처럼 일해 왔지만 젊은 의사들은 눈을 뜬 것이다. 결국 경증 환자는 병원 갈 생각을 못 하고 암환자가 진료받기까지 6개월 이상 대기하는 외국처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간호사마저 극심한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자, 비정상적인 응급의료체계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경원 교수는 “전공의 없이 전문의가 진료하는 상황이 내년 2월까지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내년 3월 새로운 전공의 지원이 시작되겠지만 병원과 마찰을 빚고 떠난 전공의들이 얼마나 돌아올지 의문이다. 의대생도 유급이나 휴가 등으로 빠져 있어 내년 전공의 지원도 불투명하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현실이 해결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암울함이다. 전망이 없으니 희망도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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