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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락인의 사건추적] 2005년 돈암동 미분양 아파트 살인 사건…DNA 함정에 빠져 헤맨 경찰

지난 2005년 6월16일 오후, 청소업체 직원 A씨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한 미입주 아파트에 들어가 홍보용 전단지를 붙이고 있었다. 이때 유독 한 집에서 코를 진동하는 악취가 풍겨왔다. A씨는 냄새의 진원지인 집 현관문 손잡이를 살며시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A씨는 집 안을 살피다 냄새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이상한 것은 없었다. 이때 A씨의 눈에 안방 화장실이 들어왔다. 그곳에 다가가니 냄새가 더욱 심하게 났다. A씨는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안에는 젊은 여성의 시신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A씨는 곧바로 112에 신고했다. 

ⓒ 일러스트 오상민
ⓒ 일러스트 오상민

연고 없는 곳에서 참혹한 죽음

출동한 경찰은 시신이 갖고 있던 소지품에서 신분증을 발견했다. 그는 일주일 전 실종신고가 접수된 이해령씨(30)였다. 발견 당시 이씨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겉이 찢어지고 속옷은 벗겨져 발목에 걸쳐 있었다. 어깨에 손가방을 멘 상태였다. 가방 안에는 휴대전화, 신분증, 신용카드, 상품권, 현금까지 소지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시 초여름 날씨 탓인지 시신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된 상태였다. 

목에 있는 작은 상처 외에 별다른 외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경찰은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했다. 시신의 부패로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지만 설골 골절이 의심된다는 소견이 나왔다. 즉 목이 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흉기에 찔리거나 둔기로 맞은 상처가 없는 것도 이를 뒷받침했다. 

여러 정황상 성폭행이 의심됐으나 정액반응 검사에서는 음성으로 나왔다. 간과 비장에서 알코올 농도가 0.14% 검출됐는데, 숨질 당시 이씨가 만취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는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남아 있었다. 이씨의 가슴 부위에서 남성의 타액(DNA)도 검출됐다. 시신의 부패 정도로 볼 때 실종 당일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다. 

관할 성북경찰서는 수사본부를 차리고 30여 명의 형사들을 투입해 용의자 특정에 나섰다. 먼저 숨진 이씨의 신상을 파악했다. 이씨는 지방의 한 대학을 나온 후 2001년 고려대에 편입해 2005년 초 졸업했다. 2004년에는 부동산 재력가의 아들과 결혼한 신혼주부였다.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으로 대학 시절에는 지방 미인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모든 면에서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런 이씨가 왜 아무런 연고가 없는 미분양 아파트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던 걸까. 경찰은 이씨가 실종된 날의 행적을 집중 탐문했다. 실종 당일인 6월9일 이씨는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오전 9시쯤 집을 나와 도시락을 산 후 B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가끔 학교에 나가 친하게 지냈던 B교수의 일을 도왔다. 

B교수와 연구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함께 먹었다. 그런 다음 오후 2시쯤 대학 내에 있는 은행에 들렀고 폐쇄회로(CC)TV에도 찍혔다. 오후 2시23분에 은행을 나와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모습이 이씨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씨는 집으로 가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곳은 이씨와 아무런 연고가 없다. 결혼 전에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해서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헤매다 왔을 리도 만무했다. 이씨의 집은 강남에 있었는데 집으로 가는 방향도 아니었다. 당시 이씨나 가족 누구도 새로운 집을 구하고 있지 않아 미분양 아파트에 올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강제로 끌려온 흔적이 없어 스스로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씨가 누구와 왜 이곳에 왔는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이씨는 이곳에 오기 전 분명 누군가와 만나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의 가족과 주변인들은 이씨가 평소 술을 즐겨 하지 않았고, 특히 만취할 때까지 마신 적은 없다고 했다. 또 숨지기 전 4개월 넘게 위장병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것을 의아해했다. 

문제는 이씨가 학교에서 나온 후 행적이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께 술을 마신 상대방도 누군지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해당 아파트 단지에는 여러 대의 CCTV가 설치돼 있었지만 입주 전이라 지하주차장에 있는 것만 정상 작동했다. 따라서 이씨가 아파트에 언제쯤 누구와 들어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경찰은 원한에 의한 살인이나 청부살인의 가능성도 열어놓고 수사를 벌였으나 의심 가는 인물이 없었다. 이씨의 학교생활은 원만했고 대인관계도 좋았다. 경찰은 이씨의 주변 인물로 수사망을 좁혀갔다. 그러다 세 명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집중 수사를 벌였다. 이씨의 남편과 전 남자친구 그리고 교수 B씨였다. 

우선 이씨의 몸에서 발견된 DNA와 세 사람을 비교해 봤지만 일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씨의 남편과 전 남자친구는 실종 당일 알리바이가 확실해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B교수는 달랐다. 

미분양 아파트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이해령씨의 생전 모습
미분양 아파트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이해령씨의 생전 모습

수상한 B교수의 알리바이 

먼저 B교수의 알리바이가 확실하지 않았다. 그가 경찰에 제시한 내용 중 저녁 7시까지의 알리바이는 확인됐다. 그런데 그 이후에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었다. B교수는 교수회의에 참석한 후 학교 근처 중국집에서 교수단 회식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식당에는 회식 전인 7시15분쯤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중국집 종업원으로부터 B교수가 회식이 시작된 7시30분보다 30~4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게 사실이라면 B교수는 해당 식당에 오후 8시10분쯤 도착했다는 것이 된다. 약 1시간30분 정도의 알리바이가 불확실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날 B교수는 회식 후 술을 마신 상태에서 이씨의 남편과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이씨의 행방을 물었다. 이때는 이씨가 실종된 사실을 아무도 몰랐고, 또 실종신고도 하지 않았을 때였다. 

B교수는 또 최초 경찰 조사에서 이씨와의 관계에 대해 “교수와 학생으로 만난 친한 사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경찰이 이씨의 몸에서 ‘범인의 DNA가 나왔다’고 하자 돌연 “우리는 내연관계였고 내 DNA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을 바꿨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을 잘 알고 있는 지인들은 하나같이 “내연관계는 사실이 아니다”고 B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B교수는 이씨에게 타살 정황이 있는데도 자살한 것처럼 몰아갔다. 그는 자신의 컴퓨터에 이씨가 쓴 “유서가 있었고 암호가 걸려 있었는데, 내가 풀었다”며 경찰에 제출했다. 이씨의 유서를 갖고 있었던 것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학생이 도와줬다”며 한 사람을 지목했다. 하지만 해당 학생은 “유서가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고, 도와준 사실도 없다”고 말했다 

경찰이 이씨의 남편과 전 남자친구를 용의선상에 올려놓은 것도 B교수 때문이었다. B교수는 유족에게 “해령이 남편에게 내연녀가 있다”고 말했다. 또 “전 남자친구에 대해서는 헤어진 지 한참 됐는데도 해령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며 경찰 수사를 분산시켰다. 

특히 사건 발생 당시 B교수는 집을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B교수는 집을 알아보고 있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함께 집을 보러 다닌 사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B교수는 유력 용의자였으나 DNA가 일치하지 않아 용의선상에서 배제됐다. 

범죄 전문가들은 이씨의 몸에서 나온 DNA를 ‘범인의 것’으로 단정 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시각이다. 시신이 발견된 미입주 아파트는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던 장소였기 때문에 범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DNA가 묻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한다. 또 DNA가 오염돼 변질될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됐다. 경찰이 처음부터 DNA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 범인을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지금까지 14년 동안 미제로 남고 말았다.        

범인이 남긴 단서들

1. 범인은 면식범이다.  

이씨는 실종 당일 오후 2시23분에 학교에서 나왔다. 그리고 일주일 뒤 학교 내 은행에서 약 3km쯤 떨어진 곳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씨가 학교를 나와서도 동선이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 이씨가 만난 사람이 교수와 학생 등 학교와 관계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이씨가 미분양 아파트까지 끌려간 정황이 없어 자발적으로 갔다고 봐야 한다. 이 또한 동행한 사람이 아는 사람일 때에만 가능하다. 

2. 범행시각은 오후 4시~7시30분 사이다. 

이씨가 실종된 당일 해당 아파트에서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방충망 설치 작업을 했다. 또 사건이 일어난 집은 전원차단기가 내려가 있었고, 화장실 스위치는 설치되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범행은 사물 식별이 가능한 시간대일 것이다. 당시 해가 긴 6월인 것을 감안하면 범행시각은 오후 4시부터 오후 7시30분까지로 볼 수 있다.  

3. 성폭행하려다 살해했다.

시신이 발견된 화장실엔 격렬한 몸싸움 흔적이 역력했다. 화장실 변기 뒤 수납장이 깨져 있었고, 그곳에 이씨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걸려 있었다. 속옷은 벗겨져서 발목에 걸쳐 있고, 양쪽 신발은 벗겨진 상태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면 범인은 이씨를 미입주 아파트로 유인하거나 데려왔고, 실내로 들어온 뒤에 성폭행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이씨가 급하게 화장실로 피했으나 뒤따라온 범인이 머리를 세게 밀치면서 수납장 유리가 깨졌고, 이때 머리카락이 끼어 빠졌다고 볼 수 있다. 범인이 옷을 강제로 벗기려고 하자 이씨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면서 신발도 벗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씨가 강하게 저항하자 범인이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범인은 현장을 떠나기 전 이씨가 입고 있던 원피스의 앞자락을 찢어내 가져갔다. 이것은 자신의 신원이 드러날 증거물이 묻었거나 지문 등 흔적을 지우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4. 범인은 현장에 단추 하나를 남겼다. 

사건 현장에서는 남성용 단추 하나가 발견됐다. 이씨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범인의 옷에서 떨어진 것이다. 이 단추는 미국의 골프웨어 ‘애쉬워스’에 부착된 것이다. 국내에서도 라이선스로 생산된 적이 있는 고가의 브랜드다. 현장에서 발견된 단추는 구멍이 2개로 보통 바지 뒷주머니나 재킷 소매에 장식용으로 달리는 것이다. 주 고객층은 30~50대다. 경찰은 이 단추의 주인을 찾기 위해 수사력을 집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 범인은 미분양 아파트 내부를 잘 알고 있다. 

당시 입주가 시작되지 않은 미분양 아파트는 누구든지 출입이 자유로웠다. 아파트 현관문의 자동잠금장치 비밀번호도 ‘0000’ ‘1111’ 등으로 통일돼 있었다. 이 때문에 부동산업자, 인테리어업자, 청소업체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범인 또한 집을 구하러 다니며 미분양 아파트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씨가 의심 없이 사건 현장에 따라온 것도 범인이 평소 집을 보러 다녔기에 의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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