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보급에만 급급한 정부, 안전 대책은 미비…주민 갈등으로 번져
“배터리 완전 충전 방지 시스템 도입하고, 충전소를 점차 지상으로 올려야”
대한민국에서 아파트에 거주하는 3000만 명이 불안에 떨고 있다. 인천 서구 청라동에서 발생한 ‘아파트 지하주차장 전기차 폭발 사고’는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안겨줬다. 이번 사고로 차량 140여 대가 전소되거나 그을림 피해를 보았고 아파트 주민 480여 세대는 폭염 속에 이재민 신세가 됐다. 문제는 전국 대다수 아파트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2010년 전후에 지어진 아파트 대부분은 지상에 주차장이 없다. 전기차도 지하에 주차해야 한다는 의미다. 친환경을 앞세워 전기차 보급에만 골몰하다가 사고가 발생한 후에야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은 국토교통부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배터리 완전 충전 방지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화재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8월7일 인천소방본부에 따르면, 8월1일 오전 6시15분경 청라동의 한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있던 메르세데스 벤츠 EQE에서 불이 났다. 현장 폐쇄회로(CC)TV 영상에는 흰색 벤츠 차량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다 폭발과 함께 불길이 치솟는 모습이 담겼다. 주민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펑’ 하는 폭발음이 연속적으로 들렸다고 한다. 불은 8시간20분 만에 겨우 진화됐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소방관 1명을 포함해 주민 20여 명이 연기를 흡입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불이 난 차량 주변으로 연소가 확대돼 주차장에 있던 차량 140여 대가 그을림, 열손 등의 피해를 보았다. 이 사고로 지하에 있던 전기배선과 수도관까지 타 480여 세대가 단전·단수됐다.
이번 사고는 ①전기차 ②지하주차장 ③아파트라는 최악의 요소가 합쳐졌다. 화재 원인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소방 당국은 벤츠에 탑재된 배터리를 주목하고 있다. 해당 차량에는 중국의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 ‘파라시스 에너지’가 만든 NCM(니켈·코발트·망간) 811이 탑재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제품은 니켈 비중이 80%에 달한다. 니켈 함량이 높을수록 주행거리는 늘어나지만 동시에 배터리 안전성은 떨어진다. 결국 배터리의 분리막이 손상되면서 양극재와 음극재가 접촉하는 쇼트가 발생해 화재·폭발(열 폭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파라시스의 배터리 제품은 화재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미국과 중국 등에서 리콜 사태를 빚은 바 있다. 당시 파라시스는 결함을 인정하고 리콜 비용을 모두 부담했다.
전기차 한 대 불붙으면 옆 차량에 옮기는 데 ‘1분15초’
전문가는 외부 충격으로 배터리가 손상됐거나 습기가 침투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김윤중 인선모터스 배터리사업팀 부장은 “험난한 도로 위를 달리다 보면 전기차에 장착된 배터리가 많은 충격을 받을 수 있다”며 “특히 전기차 배터리는 자동차 하부에 있어 더 큰 충격이 가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름 장마로 인한 수분이 내부에 침투했거나 온도 변화로 인해 습기가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며 “제조사에서 충격과 방수, 습도 관리를 잘했다고 말하지만 조립 과정에서 불량이 나올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이 사고가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지하주차장에 빽빽하게 들어선 차량이 불쏘시개가 돼 화재를 키웠기 때문이다. 소방연구원에 따르면 차량이 줄지어 늘어선 주차장에서 전기차 한 대에 불이 붙으면 바로 옆 차량까지 옮겨지는 데 1분15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다시 그 옆 차량으로 불이 붙는 데는 45초면 된다. 그사이 높이 4m에 달하는 소방차는 지하주차장으로 진입조차 하지 못했다. 전기차에 불이 붙으면 차를 이동식 소화 수조에 담그는 방법이 효과적이지만, 수조를 비롯한 질식소화 덮개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은 차량뿐만 아니라 공용 배관과 전선 등이 있는 공간이다. 이번 사고처럼 지하주차장에서 한번 화재가 발생하면 수백 세대가 단전·단수를 겪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해당 아파트는 수도관을 임시로 복구해 급한 불은 껐지만, 완전히 정비하기까지는 수개월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약해진 수도관이 손상되면 또다시 단수될 가능성도 있다. 체감온도가 35도를 오르내리는 찜통더위에 입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사고 당시 스프링클러마저 작동하지 않았다. 스프링클러는 불길이 확산하거나 주변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억제해 초기 진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소방 당국은 현장 폐쇄회로(CC)TV와 목격자 진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발화 지점을 중심으로 스프링클러가 미작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아파트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는 화재를 감지한 이후 소방 배관에 물이 통하도록 설계된 준비작동식 설비로 알려졌다. 불이 나면 2개 이상의 화재 감지기가 작동해야 수문이 열려 물이 공급되고, 불길에 헤드가 터지면 소화수가 분출된다. 이 같은 설비는 누수나 동파 위험은 적지만 밸브나 제어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물 공급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소방 당국은 스프링클러 작동 기록을 분석할 수 있는 화재 수신기를 확보해 디지털포렌식을 진행 중이다. 스프링클러 설비가 임의로 조작됐는지, 고장이 난 건지 등을 따져볼 예정이다.
지하에 있는 전기차 충전소를 지상으로 올리는 방안이 떠오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2010년 전후에 지어진 신축 아파트들은 안전 문제 등으로 지상주차장을 없애고 공원화해 왔기 때문이다. 전기차 보급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환경친화적 자동차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친환경자동차법)에도 내년 1월까지 100세대 이상 신축 아파트는 총 주차면의 5% 이상, 기축 아파트는 2% 이상 충전 시설과 전용 주차구역을 확보해야 한다고 할 뿐 어디에 설치해야 하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정부가 대책 마련에 뒷짐을 지는 동안 입주민들은 자체적으로 전기차의 지하주차장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경기 안양시 동안구의 H아파트는 전기차 배터리 폭발 사고 등이 연이어 발생하자 2023년 11월부터 전기차 충전기 9대를 모두 지상에 설치했다. 지난 2월 실시된 입주자 대표회의에선 62%의 주민이 출입 금지에 찬성했다. 당시 투표에 참여한 윤미숙씨(가명·60대)는 “솔직히 입주민 회의에서 투표할 때는 얼마나 심각한지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인천 아파트 사고를 보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무릎이 안 좋아 제대로 뛸 수도 없는데 만약에 불타는 차 근처에 있으면 어떡해야 하나.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뒤늦게 칼 빼든 정부 “전기차 배터리 안전성 검토할 것”
이에 반발한 전기차 소유주는 입주민을 상대로 민사소송까지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전기차 차주 신아무개씨(26)는 “지하주차장에 주차할 때마다 주민 눈치가 보인다”며 “지상에 주차할 공간도 없을뿐더러 충전소를 이용하는 것도 입주민 권리인데 무슨 수로 막느냐”고 토로했다. 전기차 사고의 여파가 주민 갈등으로 번지는 형국이다.
전기차 화재 예방을 위한 안전장치나 진압을 위한 대책 마련은 걸음마 단계다. 관련 법안들은 2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사고 파장이 커지자 정부는 뒤늦게 진화에 나섰다. 환경부·소방청 등은 전기차 화재 관련 회의를 열고 내달 초 종합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국토부는 내년 2월부터 ‘전기차 배터리 안전성 인증제’를 시행할 방침이다. 올 하반기부터는 자동차 안전도 평가에 배터리 안전 기능 관련 항목을 추가한다.
전문가들은 전기차 배터리 완전 충전 방지 시스템을 도입하고 방독면 등을 지하주차장에 비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아울러 향후 아파트의 전기차 충전 시설을 지상으로 점차 올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전기차 충전소에 80% 이상 충전되지 않게 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면, 충전이 계속되면서 가열로 인해 발생하는 전기차 화재의 90% 이상을 예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유럽에서는 ‘화재 확산 지연 시스템’을 도입해 불이 나더라도 운전자가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전기차 전용 구역에 화생방용 방독면 등 전용 방독면을 비치해 독성가스를 흡입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서 “향후에는 점차 전기차 충전 시설을 지상에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