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강력한 조약”이라지만 ‘군사 개입’ 놓고 미묘한 온도차
‘동병상련’이 깊어지면서 끈끈하게 손을 잡았지만 드러난 ‘동상이몽’도 만만치 않았다.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관계 격상’을 과시하는 이벤트를 펼친 김정은과 푸틴의 평양 정상회담에서 감지된 기류다. 북·러 정상이 서명한 대로 명실상부한 ‘전략 동반자’로 자리매김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높다는 얘기다. 미국 등 서방의 압박에 맞서 루블화 결제 체제를 만들겠다는 의기투합도 말로는 쉽지만 결코 녹록지 않은 문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으로 성사된 북·러 정상회담은 6월19일 하루 동안 밀도 있는 일정으로 치러졌다. 당초 18~19일에 걸쳐 1박2일 일정으로 열릴 것이란 게 크렘린궁과 평양 측의 설명이었지만 ‘지각대장’ 푸틴이 19일 새벽 3시 가까워서야 순안비행장에 내림으로써 당일치기가 돼버린 것이다.
공항 영접을 나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졸지에 폭염 속 활주로에서 ‘뻗치기’를 하며 푸틴을 기다려야 했다. 6월18일 오후 도착 예정이었으니 적어도 6시간은 순안공항에서 뻗치기를 한 것이다. 푸틴을 맞는 김정은은 웃음을 보였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곁에는 의전 담당 현송월 노동당 부부장 한 사람뿐이었다.
‘관계 격상’ 과시한 김정은과 푸틴
회담의 하이라이트는 2시간 동안 금수산영빈관에서 이뤄진 단독회담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은과 푸틴은 통역만 배석한 채 원탁에 마주 앉았다. 김정은이 최선희 외무상이나 박정천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조용원 당 조직비서 등 확대회담에 배석했던 측근들에게도 감추고 싶은 민감한 이슈나 껄끄러운 의제를 푸틴에게 꺼냈을 공산이 크다.
지난해 9월 만남에서 푸틴이 약속한 군사정찰위성 기술 대북 제공의 연장선상에서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새로운 추진체와 관련해 좀 더 완벽한 지원을 요구했을 수 있다. 올해 3차례 정도 쏘아올리겠다고 공언한 군사정찰위성 발사는 5월27일 1단계 로켓이 폭발하면서 추락해 국제적인 망신을 샀고, 더 이상 차질을 빚지 않도록 조속한 재발사 일정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다. 대북 식량 제공 등 인도적 차원의 지원 요청도 단독회담을 통해 전달됐을 수 있는데, 푸틴도 노동신문 기고문에서 2차례나 ‘인도주의적인 협조’를 강조한 만큼 곡물 제공이나 의약품 공여는 무리 없이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푸틴도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추가적인 포탄 및 무기 제공을 은밀하게 김정은에게 타진했을 공산이 크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북한이 러시아에 제공한 122mm와 152mm 포탄이 180만 발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전에 사용한 포탄의 40%를 차지하는 물량이라는 게 한미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러시아는 북한의 신형 240mm 방사포나 전차 정비 등에 필요한 부품의 공급도 북한에 바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가장 큰 파장을 예고한 건 북·러 간 포괄적 전략동반자협정 체결이다. 푸틴의 평양 방문 사실이 공식 발표된 6월17일 유리 우샤코프 크렘린궁 보좌관은 양측이 협정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리며 “이 문서가 체결된다면 현재의 세계 지정학적 상황과 러시아와 북한의 양자 관계 수준을 반영하게 될 것”이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북·러 모두 협정 체결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는 의미다.
푸틴의 ‘상호지원’ 의미 두고 설왕설래도
협정 서명 직후 푸틴은 “오늘 서명한 포괄적 전략동반자협정은 무엇보다도 협정의 당사자 중 한쪽이 침략당할 경우 상호지원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획기적인’ 협정을 통해 북·러 관계가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려졌다는 주장도 했다. 크렘린 측 설명에 따르면 새 협정은 1961년 북한이 소련과 맺은 ‘조·소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과 2000년 ‘우호·선린·협조 조약’, 그리고 2000년과 2001년 북·러 정상 간에 체결된 선언을 대체하게 된다.
그렇지만 푸틴이 밝힌 상호지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번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의 자동 군사 개입을 의미하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김정은이 ‘동맹’이란 표현까지 동원해 협정 체결의 의미를 부각시키며 고무된 모습을 보인 것도 이런 분석에 한몫했다.
실제 북한이 6월20일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한 협정 전문을 보면 예상보다 훨씬 강도 높은 조치들이 담겼음을 알 수 있다. 협정 제4조는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유엔 대북 제재와 안보리의 권고 등에 반하는 행동을 일삼아온 러시아와 북한이 양자 협정에서 유엔헌장을 들먹이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북·러 양측이 문제의 협정이 유엔 등 국제사회의 틀 속에서 다뤄질 것이란 점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충분히 읽힌다.
협정 4조의 ‘군사적 원조’ 대목은 1961년 당시 소련과 북한이 체결한 ‘조·소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에 담겼던 ‘유사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을 부활시킨 것이란 주장까지 나온다. 1990년 소련이 한국과 전격 수교하면서 1996년 이를 승계한 러시아가 북한에 대해 이 조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은 폐기된 바 있다.
김정은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조약”이라며 반기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한반도 유사시 푸틴과 러시아가 실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원조를 제공할 것인지 여부다. 우크라이나 전쟁 수행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푸틴이 일단 협정에 올리긴 했지만 향후 사태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에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요소가 적지 않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푸틴이 “협정 틀에서의 군사협력”을 강조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유엔헌장’까지 반영한다는 의미라면 군사지원의 취지는 상당히 퇴색될 수밖에 없다.
군사적 원조가 반드시 파병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고, 북한뿐 아니라 러시아 측 협정문의 표현이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군사 조약 관련 업무에 정통한 전직 정부 당국자는 “협정에 담긴 ‘무력침공’이라는 표현을 놓고도 특정 상황이 이에 해당하는지 상당한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문제의 협정에 대해 북한의 후견국임을 자처하는 중국이 미묘한 기류를 보이고 있어 향후 북·중 및 중·러 관계에도 파장을 미칠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북핵 위협의 증대와 이에 맞선 한반도와 주변 지역의 미군 주둔 확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중국은 북·러 정상회담 일정에 포함된 18일 서울에서 한중 차관급 안보대화를 개최했는데, 김정은과 푸틴의 만남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중국이 한중 고위 대화를 예정대로 가진 건 북·러 밀착에 대한 경계심에서 견제구를 던진 것이란 해석까지 나온다.
김정은의 속내, 결국 러시아보단 미국과의 거래
미국을 주축으로 한 반러, 반북 연대가 만만치 않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6월18일(현지시간)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과 워싱턴DC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나 이란과 같은 국가들의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혀 이번 북·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북 압박의 파고도 더 거칠어질 기세다.
한국 정부가 북·러 정상회담 이튿날 정부 성명을 통해 ‘규탄’이란 표현까지 동원해 우려를 나타낸 것도 마찬가지다. 북한과 러시아를 6·25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의 책임자로 지목하면서 한미 동맹을 통한 대응을 경고한 건 윤석열 정부의 격앙된 내부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목되는 건 푸틴과의 브로맨스에 공을 들이고 있는 김정은의 속내다. 모스크바가 김정은이 타고 있는 열차의 중간역에 불과할 것이란 점을 곱씹어보면 결국 최종 기착지는 워싱턴이 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미덥지 못한 푸틴의 동아줄보다는 신뢰 가능한 안전판인 미국과의 거래가 남는 장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화려한 귀환을 고대하고 있을 김정은으로서는 로드맵과 전략을 치밀하게 세워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5년 전 하노이에서 당했던 굴욕을 만회하고 대북 제재 해제와 관계 개선 등을 거쳐 체제를 인정받는 게 그 핵심일 수 있다. 사실상의 집권 첫해인 2012년 4월 첫 공개 연설을 마무리하며 김정은이 던진 ‘최후의 승리’는 이를 지칭한다.
이를 위해 김정은은 북·러 밀착을 다져가는 한편 남북관계를 적대적으로 몰아감으로써 한반도 긴장 수위를 한껏 올리는 호전적 행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대북 전단을 빌미로 한 대남 오물풍선 세례에 이은 새로운 유형의 도발이 우려되는 이유다.
정부와 군 당국이 대북 확성기 방송으로 인해 북한이 오물풍선 이후 추가 도발을 멈췄다고 판단하는 건 일견 타당하다. 그렇지만 공교롭게도 대남 비난 공세의 전면에 섰던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꼬리를 내린 건 푸틴 방북 일정이 조율되는 시점이었다. 확성기도 껄끄러웠겠지만 정상회담 테이블에 앉은 오빠의 의전을 챙기는 데 집중하기 위해 휴지기에 들어갔을 수 있다는 얘기다. 격동에 휩싸인 한반도와 주변 정세를 주도적으로 관리하고 김정은 체제의 리스크를 억제할 전략과 혜안이 긴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