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권분립의 기본은 대등성…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 끌려다니지 말아야
민심 늘 변하기에 선거에서 이겼다고 특정 정당이 사법부 흔들어서는 안 돼
제22대 국회 출범 직후부터 민주당의 정부·여당에 대한 공세가 거세다. 한편으로는 법사위, 운영위 등 상임위원장 독식에 여당 의원들의 상임위 강제 배정을 비롯해 각종 특검법 및 국회법 개정안이 발의되었고, 나아가 수사기관 무고죄, 표적수사 금지도 거론되고 있다.
특히 법원이 대북 송금 사건의 이화영 전 경기부지사에 대해 중형을 선고한 이후 민주당의 사법부에 대한 압박이 매우 강하게 나오고 있다. 이러한 민주당의 태도에 대해서는 이재명 대표의 방탄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정작 사법부에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 조희대 대법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사법부가 겪는 여러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민주당의 압박에 대한 정면 대응은 자제하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이 사법부가 민주당이 지배하는 국회에 끌려다니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사법부가 언제부터 이렇게 무기력해졌을까? 돌이켜 보면, 군사정부 시절의 사법부가 정치권력에 굴종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사법살인으로 비난받는 판결도 적지 않았고, 이러한 판결들은 민주화 이후 재심에 의해 무죄로 번복되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사법부의 위상이 높아졌던 것이 왜 이렇게 추락하게 되었을까?
사법부는 다수결과 무관…법치의 최후 보루
삼권분립의 기본은 입법, 집행, 사법의 대등성이다. 따라서 국회와 대통령(정부), 대법원, 헌법재판소는 헌법상 대등하다. 다만, 대통령은 국회에는 여당을 매개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법부에는 대법원장·대법관 등의 인사권을 통해 역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로 인해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가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을까? 헌법상 권한에 비추어볼 때,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대통령을 등에 업은 여당도 아니고, 야당인 민주당이 지배하는 국회가 사법부를 억압할 수 있는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법농단 의혹 및 김명수 사법부의 적절치 못한 행동들을 통해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잃고, 권위가 실추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당이 제22대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민심을 (비록 한시적이지만) 등에 업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민심은 계속 변하는 것이며, 총선 당시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율과 현재의 지지율 사이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다. 따라서 사법부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자신의 문제, 즉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급격하게 낮아졌고, 그로 인해 사법부의 권위도 함께 추락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사법부가 입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입법과 사법은 대등해야 하며, 정당하지 못한 법률로 사법부를 굴종시켜서는 안 된다. 설령 국회에서 사법 개혁을 앞세우더라도 사법의 본질인 공정한 재판을 해칠 수 있는 입법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임을 사법부가 앞장서 국민을 이해시켜야 한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법언(法諺)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법부는 국민과의 소통 및 이를 통한 신뢰 회복을 위해 판결 이외에도 다양한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통해 사법부의 권위가 회복되었을 때, 입법의 힘으로 사법을 억압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며, 이에 대한 대처는 수월해질 것이다. 민주정치의 본질은 국민의 의사를 합리적으로 수렴해 국가 의사를 형성하는 것이며, 사법의 본질은 공정한 재판을 통해 법적 분쟁을 정의롭게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을 벗어나 왜곡된 정치도 있고, 왜곡된 재판도 있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 인정되는 것이 삼권분립이다. 어느 하나의 권력도 절대적 타당성을 담보하지 못하므로 상호 견제와 균형 속에서 왜곡된 행태를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정치의 속성은 권력 지향이며, 그로 인한 왜곡의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더욱이 민주국가에서도 다수결을 앞세워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다수의 횡포는 존재하기에 사법부는 다수결과 무관하게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인권 보장 및 법치의 최후 보루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정치의 사법 억압, 악순환의 출발점
그런데 법관선거제를 하자는 것은 노골적으로 사법을 정치화하자는 것이며, 사법의 본질인 공정한 재판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려는 것이다. 선거로 법관을 선출하는 것이 민주적이라는 오해는 정치와 법의 차이점, 정치의 역할과 사법의 역할이 다름을 간과한 탓에 나온다.
정치 과정에 의해 법률이 만들어지지만, 그 법률이 헌법의 틀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올바른 정치 과정에 의해 올바른 법이 만들어지고, 그 법이 다시금 정치 과정을 제대로 통제한다면 정치와 법은 서로를 발전시키는 시너지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왜곡된 정치 과정에 의해 왜곡된 법이 만들어지면, 그 법이 다시금 정치 과정을 더 심하게 왜곡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정치가 사법을 억압하는 것이 이런 악순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에 더욱 우려스러운 것이다.
1988년 헌법재판소가 처음 창설되었을 때, 국민은 무관심했고, 국회는 헌법재판소가 법률에 대한 위헌결정을 내릴 때마다 노발대발했다.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을 헌법재판소가 감히 위헌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정작 헌법에 의해 위헌법률심판권이 헌법재판소에 부여되었음에도.
시간이 흐르고,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판이 잘못된 법률을 무효화함으로써 국가 질서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국민이 알게 되면서, 국민의 기본권이 공권력에 의해 침해되었을 때, 헌법소원심판이 힘이 된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헌법재판소는 점차 국민의 신뢰를 얻었고, 더불어 귄위도 높아졌다.
요즘 국회의원들이 법률에 대한 위헌결정에 대해 예전처럼 노발대발하는가?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존중을 말할 뿐이다.
이제 사법 불신의 늪에 빠져 있는 법원이 해야 할 일은, 과거의 헌법재판소처럼 국민과 공감하는 가운데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법관들이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국민과 함께 호흡하고자 한다면, 국민이 생각하는 정의를 때로는 재판에 반영하고, 때로는 국민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들을 차분하게 설명한다면, 사법 불신을 해소하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도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할 것이다. 원인을 알면 답도 보인다. 다만, 이를 꾸준히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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