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의 없이 안 돼”…체코 당국에 이의 제기하며 여론전 개시
미국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의 ‘체코 원전’ 흔들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원전 수주를 놓고 체코 당국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원전 기술과 관련해 한수원을 상대로 소송도 진행하고 있는 상태다. 내년 3월 본계약 체결을 앞둔 가운데 한수원을 비롯해 우리 정부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행보다.
하지만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출 당시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당시에도 웨스팅하우스는 지식재산권을 주장하다 주요 설비 제작을 맡는 형식으로 사업에 참여하며 반대의사를 철회한 바 있다.
“1997년 한전과 맺었던 협정 위반”
체코 원전 수출길이 막판 난기류를 만났다. 웨스팅하우스는 8월26일(현지시간) 한수원이 두코바니 신규 원전 2기 건설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데 항의하기 위한 이의 제기(appeal)를 체코 반독점사무소(UOHS)에 제기했다고 밝혔다. 웨스팅하우스는 체코 원전 수주전 당시 한수원과 프랑스전력공사(EDF) 등과 경쟁을 펼쳤으나 올해 1월 가장 먼저 탈락했다.
웨스팅하우스는 보도자료를 통해 “원전 입찰에 참여하는 사업자는 원전 기술을 체코 쪽에 이전하고 2차 라이선스를 제공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며 “한수원의 APR1000 및 APR1400 발전소 설계는 웨스팅하우스 라이선스를 받은 기술을 활용한다”고 주장했다. 한국형 원전인 한수원의 APR1000 원자로가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의 동의 없이 제3자에게 원전 기술을 재허가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전 세계 절반 이상의 원자력발전소에 원자로·엔지니어링 원천 기술을 제공한 글로벌 원전 기업이다. 1978년 우리나라의 첫 상업용 원전인 고리1호기도 이 회사의 기술을 전수받아 건설됐다. 국내에 건설한 28기 원전 가운데 18기에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이 이용됐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다르다. 2017년 한국형 원전의 핵심 기술 국산화가 마무리되면서 독자 개발에 성공한 상태다.
웨스팅하우스의 발목 잡기는 예견된 바 있다. 웨스팅하우스는 2022년 10월 당시 한수원이 폴란드와 체코 등에 수출하려고 하는 원전이 미국 원자력에너지법에 따른 수출통제 대상인 웨스팅하우스의 원천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며 ‘미국 정부 허가 없이는 수출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취지의 소송을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에 제기한 바 있다. 이번 이의 제기와 같은 논리다.
웨스팅하우스의 전략은 먹히지 않았다. 지난해 9월 미 연방지방법원은 “수출통제 집행 권한은 미국 정부에 있으며 민간기업인 웨스팅하우스가 소송의 주체가 될 수 없다”며 각하 판결을 내린 것이다. 웨스팅하우스 측은 “미국 연방법원의 판결은 수출통제 집행 권한이 미국 정부에 있다고 판결한 것에 불과하다”며 즉각 항소했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웨스팅하우스의 행보에 대해 “원전 시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시장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비즈니스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의 주장에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정 교수의 입장이다. 그는 “지식재산권 침해를 계속 얘기하고 있지만 특정 기술을 도용했다는 주장은 내놓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지재권은 민간 차원의 문제라 오히려 민사소송을 걸었어야 하지만 웨스팅하우스는 수출통제를 내세워 소송을 걸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감 주는 대신 소송 문제 마무리 지어야”
웨스팅하우스의 주장은 1997년 한전과 맺었던 기술사용협정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한전은 한국형 원전을 미국을 제외한 나라에 수출하는 데 제약이 없도록 협정을 체결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별도의 대가를 지불했다. 당시 협정 체결 과정을 잘 알고 있는 관계자는 “원전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실시권’이 협정문에 분명히 적시돼 있는데 웨스팅하우스가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계속 걸고넘어지고 있다”며 “이에 더해 2007년 이후엔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는 자유롭게 수출이 가능하다는 조항도 있는데 몽니를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원전 수출을 위해선 웨스팅하우스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48개국이 가입한 핵공급그룹(NSG) 지침에 따르면, 원전 기술을 제3국에 이전할 때는 그 기술을 가진 해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미국 원전에 기반을 둔 한국형 원전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수출통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앞서 지난해 1월 미국 에너지부는 원전 수출 신고의 주체가 미국인 또는 미국 법인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한수원의 신고를 반려한 바 있다. 사실상 웨스팅하우스가 원전 수출의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이에 ‘UAE 바라카 원전’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당시에도 웨스팅하우스는 지재권 침해를 꺼내들었다. 이에 원자로 냉각재펌프와 터빈 기자재 등을 웨스팅하우스로부터 구매하는 형식으로 반대 주장을 철회하게 했다. 업계 관계자는 “체코 원전에 도입될 APR1000 원자로는 국산화가 돼 있는 상황이지만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 측면에서 일감을 맡길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다만 협상 과정에서 저자세로 나갈 이유는 없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주장이다. 그는 “UAE 때보다는 적은 부분을 담당하게 하면서 소송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면서 “협정에 의거해 원칙을 지키면 어렵지 않게 갈등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웨스팅하우스와의 문제 해결이 중요한 이유는 이번 분쟁 결과가 체코 원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최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체코 원전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이 한국형 원전에 대해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인터뷰에서 황 사장이 언급한 국가만 스웨덴, 핀란드, 네덜란드, 슬로베니아, 노르웨이, 카자흐스탄 등 6개국이다. 향후 추가 수주를 위해 웨스팅하우스와의 갈등을 깔끔하게 매듭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정동욱 교수는 “웨스팅하우스가 불가리아 원전 사업에 한국 기업을 참여시켰듯 공생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서 “다만 추후 수주전을 고려해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도록 성급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한수원 관계자는 “진행 중인 분쟁이 체코 원전사업에 영향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