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 떨어진 프랑스 제치고 체코 사업 따내
동유럽 국가들 원전 확대 움직임…체코 수주는 첫걸음
7월18일 체코 정부가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설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중심의 ‘팀코리아’를 선정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2009년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수주 이후 15년 만의 쾌거다. 체코 정부는 남부 두코바니 지역에 1000MW급 대형원전 가압경수로 2기를 2029년 착공해 2036년 상업운전에 들어갈 계획이다.
체코는 6기의 원자로를 통해 전체 전력 생산량의 약 40%를 감당하는 원자력발전 강국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현재 전체 전력의 44%인 석탄화력발전을 대폭 감소시키고 그 공백을 원전으로 메운다는 것이 체코의 장기 에너지 정책의 핵심이다. 2040년이 되면 체코의 전력 생산에서 원전 비중은 46~58%에 이를 전망이다.
체코 정부가 원자력발전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배경에는 국민적 지지가 있다. 체코 국민 70% 이상이 원전 확대에 긍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석유, 가스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체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안보가 현실적 과제로 떠오르자 그 해결 방안으로 원자력을 선택한 것이다.
체코는 원자력발전소 건립을 위해 2022년부터 유럽연합(EU)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EU는 원자력이 과연 녹색에너지원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진행 중이었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원자력을 녹색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은 탄소배출 감축 측면에서 원자력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코, EU 지원으로 비용 조달 문제 해결
프랑스가 동유럽 국가들을 지원하면서 사용후 핵연료 처분장 건설과 저항성 피복 연료봉 도입 등을 조건으로 원자력도 녹색에너지원으로 인정됐다. 이에 따라 EU는 회원국의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립 사업에 예산을 지원할 수 있게 됐다. 올해 초 EU는 체코가 신청한 두코바니 원전 건설을 위한 자금 조달 계획을 승인했다. 궤도에 올라선 체코 원전 사업은 프랑스의 프랑스전력공사(EDF)와 경쟁한 끝에 팀코리아의 승리로 끝났다.
EU의 지원에 따라 체코는 원전 건설을 위한 비용 조달 문제를 해결했다. 체코 정부가 원자력발전소 건립을 담당하고 있는 국영 CEZ그룹 자회사 EDU에 건설 비용의 70~90%를 대출 형태로 제공하고 나머지를 CEZ그룹이 조달하는 구조다. 국가 대출금에 대해 CEZ그룹은 40년에 걸쳐 전력 판매대금을 통해 상환하는데, 이를 위해 원자력발전을 통해 생산되는 전력의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해 주기로 했다. 우리로서는 자금 조달에 대한 부담 없이 사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체코를 비롯한 폴란드,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향후 10년 내에 최소 12기의 신규 원전 도입을 원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소련의 지원으로 1970~80년대 건설한 다수의 원전이 있다. 하지만 최대 50년 동안 가동한 만큼 이를 대체할 원전을 건립해야 한다.
문제는 비용이다. 12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총 1390억 달러(약 192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이를 과연 어디서, 어떻게 조달할지가 관건이다. 일단 EU는 녹색에너지 계획에 따라 2028~34년에 진행될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지원 여부 및 규모를 내년 6월까지 결정할 예정이다.
동유럽 국가들이 원자력발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이유는 주력 발전이었던 석탄화력발전을 더 이상 대규모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유럽 국가들은 풍력 및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동유럽 국가들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동유럽 지역은 서유럽에 비해 풍력 및 태양광발전에 불리할 뿐만 아니라 재생에너지 도입에 수반되는 보조금 지급 및 송배전망 확충에 소요되는 보조금을 제공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동유럽 국가의 제조업 역량도 원자력발전 선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지난 30년 동안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하기 위해 각종 제조업을 동유럽으로 이전했다. 그 결과 동유럽 국가들은 제조업을 통한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성공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저렴하면서 대량의 전력을 공급하는 것이 필요한데 원자력발전이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흔들림 없는 원자력 정책 유지 필요
동유럽 국가들의 원자력 확대 방침에 따라 이들 국가에 원자로를 공급하기 위한 국가 간 경쟁도 치열하다. 해당 지역에서 2020년 이전까지 러시아의 국영 원자력 기업 로사톰은 압도적인 경쟁력을 자랑했다. 소련 시절 건설했던 원자로의 유지·관리를 통해 각국의 상황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원 조달, 연료봉 공급 및 사용후 핵연료 처리까지 모든 과정을 일괄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로사톰의 역량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전후해 국가안보 관점에서 러시아에 주요 인프라 사업을 맡길 수 없다는 의견이 커졌다. 최근 로사톰은 동유럽 지역의 입찰에 참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사업자는 프랑스의 EDF였다. 자국 내 56기 원자로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 다수 국가에 원자력발전소를 공급한 실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엔 공기 및 예산 관리에 실패하면서 신뢰를 잃고 있다. 얼마 전 시운전에 들어간 프랑스의 플라망빌 3호기는 공사기간이 계획보다 12년 늘어난 17년이었다. 사업비용 역시 33억 유로(약 5조원)에서 99억 유로(약 14조8000억원)가 초과했다. 영국, 핀란드 등의 해외 사업장도 비슷한 상황이다. 여기에 20년 가까이 신규 원전을 건설하지 못하면서 기술인력의 대규모 퇴직과 고령화에 따른 노하우 상실에 더해 관련 산업 생태계의 붕괴가 겹치면서 EDF의 경쟁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동유럽 국가들의 원전 확대는 우리로서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는 것이며, 체코에서의 수주는 이를 위한 첫걸음에 해당한다. 제조업 기반이 존재하고 있는 동유럽 국가의 특성을 고려해 현지 업체들과의 적극적인 협력과 역할 분담을 통해 우호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한국 내 흔들림 없는 원자력 정책을 통해 예정된 원전 건설과 계획된 관련 산업 생태계 및 인력을 유지하며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