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1000대 기업, 지난해 R&D에 72조원 투자
친환경 에너지·바이오 등 미래 성장동력 찾기에 분주
주요 기업들이 비상경영 체제를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업구조 재편, 임원 대상 주6일제 환원 등 위기 대응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기업들이 경영 전반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지만 연구개발(R&D)은 예외다. 과감한 투자를 통한 미래 기술 확보가 기업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6월24일 발표한 ‘2023년 국내 R&D 투자 상위 1000대 기업의 R&D 투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R&D 투자 상위 1000대 기업의 매출액은 전년 대비 2.8% 감소했으나 R&D 투자액은 오히려 8.7% 늘어난 72조5000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액 대비 R&D 투자액 비중은 3.9%에서 4.4%로 증가했다. 국내 기업들이 R&D에 과감히 투자하고 있다는 의미다.
반도체 노하우 바탕으로 AI 생태계 확장
R&D 투자의 선두주자는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000대 기업 전체 R&D 투자의 33%에 해당하는 23조9000억원을 집행했다. R&D 투자를 통해 얻어진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효율적인 투자와 체질 개선 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최근 삼성전자 R&D 투자의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다. 특히 반도체의 경우 40년간 쌓아온 독보적인 기술 노하우를 바탕으로 AI 반도체 생태계를 확장할 다양한 메모리 제품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반도체연구소를 양적·질적 측면에서 두 배로 키우고 있다. 연구인력과 R&D, 웨이퍼 투입을 지속적으로 늘려 첨단 기술 개발의 결과가 양산 제품에 빠르게 적용되도록 할 계획이다.
6G 기술 리더십 선점을 위한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선도적인 이동통신 기술을 바탕으로 5G 대비 전력 소모와 통신 커버리지를 개선하는 안테나 기술, 신규 주파수 대역을 지원하기 위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등 6G 핵심 기술들을 폭넓게 개발하고 있다.
미래 성장동력으로 ‘ABC(AI, 바이오, 클린테크)’ 분야를 적극 육성하고 있는 LG그룹은 ‘LG AI연구원’을 중심으로 R&D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LG는 LG AI연구원에서 연구하고 있는 초거대 AI를 통해 계열사의 난제 해결을 돕고, 이종 산업 분야와의 협업도 늘려 AI 리더십을 조기에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바이오 사업을 이끌고 있는 LG화학 생명과학본부에도 꾸준히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신약 개발을 위한 R&D에 투자한 규모만 3000억원이다. 매출 대비 R&D 비용 지출 규모는 약 33%로, 업계 최고 수준의 R&D 투자다. 구광모 LG 대표 역시 30년의 투자 끝에 꽃을 피우고 있는 배터리 사업을 언급하며 “LG의 바이오 사업이 지금은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꺾임 없이 노력하고 도전해 나간다면 LG를 대표하는 미래 거목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한화그룹은 항공우주, 친환경에너지, 디지털금융 등에 집중 투자하며 ‘100년 한화’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민간이 우주개발을 주도하는 ‘뉴 스페이스 시대’에 맞춰 선제적인 투자로 우주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위해 그룹 내 우주사업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스페이스 허브’를 중심으로 저궤도 위성통신 기술의 핵심인 ISL(위성 간 통신 기술) 개발과 함께 민간 우주개발·위성 상용화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연구할 예정이다.
한화큐셀은 미래 태양광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떠오르고 있는 차세대 태양전지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과 독일 R&D센터가 주축이다. 아울러 2026년 양산을 목표로 약 1300억원을 투자해 탠덤 셀과 모듈 양산을 위한 시험생산 설비를 구축하고 있다. 이론 한계효율이 29% 수준인 실리콘 태양광 셀보다 효율이 높은 탠덤 셀 양산화가 주된 목표다. 탠덤 셀의 이론 한계효율은 44%에 달한다.
한화큐셀은 차세대 태양전지에 집중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부설 연구소를 설립해 원천기술 확보에 꾸준히 투자해온 효성은 지속 가능 소재 사업과 신소재 분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2022년 효성티앤씨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리젠 바이오 스판덱스’는 차세대 지속 가능 섬유로 각광받고 있다. 옥수수에서 추출한 원료를 가공해 만든 리젠 바이스 스판덱스는 거의 모든 의류에 포함되는 스판덱스 원료부터 자연친화적인 것으로 바꾸면서 화학적 에너지원 사용을 줄이고, 줄어든 탄소세로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효성이 바이오 섬유 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최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객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제품을 통해 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조현준 회장의 지론 덕분이다. 앞으로도 효성은 생분해 섬유 등 차세대 지속 가능 섬유에 대해서도 연구개발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식품 분야에선 CJ제일제당이 미래 기술 확보에 적극적이다. 국내 식물성 식품 시장을 겨냥해 론칭한 식물성 식품 브랜드 ‘플랜테이블’은 출시 후 지난해 말까지 누적 판매량 약 800만 개를 돌파했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식물성 단백질인 ‘TVP’를 활용해 고기 맛과 탄력 있는 식감을 구현한 점이 주효했다”고 밝혔다.
사료 첨가제를 생산하는 바이오사업부문이 보유한 전 세계 500개 이상의 지식재산권(IP) 역시 R&D의 산물이다. CJ제일제당은 이를 바탕으로 라이신, 메티오닌, 트립토판 등 8종의 글로벌 최다 사료용 아미노산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시장을 이끌고 있다.
글로벌 50대 제약사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유한양행의 R&D 행보도 주목된다. 국산신약 제31호인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우선심사 대상에 올라있다. 업계에선 오는 8월 중 렉라자 병용요법에 대한 신약 허가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제2의 렉라자가 될 수 있는 후보 약물도 대기하고 있다. 알레르기 치료제 YH35324는 경쟁 약물과 비교해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임상 결과를 내놓았다. 임상 1상을 진행 중인 면역항암제 YH32367은 비임상실험에서도 항암 효과·안전성이 추가 확인됐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현재 항암 및 대사 관련 질환 파이프라인을 기반으로 파이프라인 다각화를 시도하고 있다”며 “오픈이노베이션을 통해 여러 협력사와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으며 R&D 중심의 글로벌 회사로 도약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