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 굶으며 갔다 /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 코리아의 보릿고개 /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황금찬 시인의 시 《보릿고개》 중 한 소절이다. 보릿고개를 소재로 한 시는 우리 문학사에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만큼 인간의 생사를 가를 정도로 중대한 수난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보릿고개’는 농작물이 주 수입원이었던 지난 시대, 그 전해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 5~6월 농가의 식량 사정이 몹시 어려운 때를 말한다. 춘궁기 혹은 맥령기라고도 불렸다.
우리의 삶에 보릿고개라는 복병을 숨겨놓았던 봄은 식생활의 위기만큼이나 고달픈 아픔의 절기이기도 하다. 특히 근현대에 들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한 역사적 사건, 특히 비극·참사가 많았다. 가장 먼저 3·1 만세운동이 있었고, 제주 4·3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4월 혁명과 연관된 3·15 부정선거와 4·19가 있었으며, 6·25도 빼놓을 수 없다. 가까운 사건으로 무려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가 봄날인 4월16일에 일어났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도 다르지 않다. 무수한 생명이 정권의 폭력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지우기 어려운 슬픔을 우리 가슴에 큰 덩어리로 남겼다.
여전히 그날의 비통함에 갇혀 힘겨운 시간을 겪고 있는 세월호 참사 피해 유가족들은 10주기를 맞은 올봄에도 그 아픔을 차마 가누지 못해 많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5·18 유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슬픔의 꼬리는 한없이 길고 조롱과 폄훼의 독설마저 사라지지 않는 세월을 견뎌내기는 지옥의 공기처럼 무겁기만 할 터다.
역사를 뒤흔든 거대한 슬픔들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며 기억하는 일이다. 이는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막아내려는 가장 기본적인 노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날의 충격과 슬픔을 다룬 연극·영화·음악·미술과 같은 예술작품들이 만들어지고 각종 전시회와 행사들도 줄을 잇는다. 그것들은 모두 슬픔을 공유하고 함께 기억하려는 연대의 발걸음이 된다.
지난 5월18일은 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 정치권 인사들이 광주 5·18 민주묘지에 모였다.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오월의 정신이 깊이 뿌리내리면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워냈다”고 운을 뗀 후 “정치적 자유는 확장되었지만 경제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국민들이 있다.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켜서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복원하고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면서 서민·중산층 중심 시대를 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그가 그동안 각종 연설에서 자주 발설했던 ‘자유’라는 단어는 이날도 어김없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대선 당시 공약했던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국민의힘도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는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헌법 개정의 범위에 대해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5·18 정신의 헌법 전문 명시는 역사의 환부에 함부로 소금 뿌리는 행위들을 막기 위함은 물론, 피로 얼룩진 그날의 비극에 대해 모두가 함께 책임지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우리 역사에 남겨진 봄날의 여러 슬픔을 건강하게 이겨내는 것은 결국 그 일을 망각하지 않고 온전히 마음에 챙기는 기억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