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절대권력 무너뜨린 공포의 대상 도쿄지검 특수부
최근 자민당 파벌 비자금 수사로 다시 권력과 맞서
“정치를 하려면 가능한 한 특수부의 눈에 띄지 않는 정치를 하라.” 이 말은 일본 금권정치의 효시인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1972~74년 재임)가 다나카파 정치 후배들에게 틈만 나면 외치던 훈시였다. 나는 새도 떨어트릴 만큼 전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그가 사망(1993년)했음에도 이 말은 아직까지도 일본 정가에서 유효하다. 아마도 일본 정계 제1인자였던 자신을 기소한 도쿄지검 특수부 칼날의 위력을 몸소 경험한 때문일 터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우리나라의 특검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한국의 특검은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의 비리 및 잘못에 대한 자료를 토대로 기소하는 등의 독자적인 수사를 할 수 있는 독립 수사 기구’지만, 일본의 특수부는 ‘일시적’이 아닌 검찰청의 상설 부서로 도쿄 외에 오사카, 나고야 지방검찰청 등 3곳에 설치되어 있다. 통칭 ‘특수부’라고 불린다. 특수부 평균 인원은 4~5명으로, 사건이 생기면 인원은 사건 규모에 따라 대폭 증원된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대유행어 탄생시키기도
특수부가 일본 국민의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된 것은 다나카 전 총리가 전격 구속된 이후부터다. 다나카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일본 정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제1인자였다. 니카타 어촌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올라와 1972년 최고의 권좌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강력한 무기가 된 것이 바로 ‘돈’이었다. 돈으로 국회의원이 됐고, 돈으로 자신의 파벌도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고 확장시켜 마침내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 같은 그의 정치 스타일 덕분에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이미지는 ‘금권정치의 효시’로 인식되고 있다.
문제는 절대적인 권력자이니만큼 지켜보는 시선도 많았다는 점이다. 사실 문제의 발단은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비롯됐다. 항공기 제조업체인 록히드사 스캔들이 미국 의회에서 터진 것이다. 록히드사가 제조한 항공기를 일본에 판매하기 위해 거액을 들여 로비를 했는데 그중 일부가 일본 거물 정치인에게도 전달됐다는 것이었다. 21억 엔이라는 구체적인 로비 액수도 밝혀졌다.
열도가 발칵 뒤집혔다. 그 거물이 누구냐며 언론이 추적에 나섰고, 특수부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로비 대상 항공사인 젠닛쿠(全日空/ANA) 사장, 마르베니 전무, 국제흥업 사장 등 미국 의회에서 거론됐던 이름이 그대로 에 전해졌다. 그때만 해도 다나카는 현직 총리였다. 때문에 언론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 그가 권력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특수부에서도 그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키는 업적을 이뤄냈다. 그래서인지 그의 정치적 미래는 그의 영향력만큼이나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하지만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74년 문예춘추에 논픽션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가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그의 금맥과 인맥’이란 타이틀로 적나라한 폭로 기사를 발표한 것이다. 처음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기사 내용은 엄청난 핵폭탄급인데 일본 언론이나 여론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당시 다나카 총리가 외신기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외국 특파원들의 질문은 대부분 록히드 사건과 다치바나가 쓴 기사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예상한 대로 다나카 총리는 전면 부인했다. 자신은 절대로 록히드사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딱 잡아뗐다. 이 기자회견은 전 세계로 타전되어 퍼져 나갔다. 그러자 일본 언론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회에서도 난리가 났다. 야당에서는 특수부에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론도 다나카 총리를 의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악화된 여론에 떠밀려 일단 총리직을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동료 정치인들과 언론을 상대로 자신은 결백하다고 큰소리쳤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파벌과 단합대회를 열며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자임을 과시했다. 때문에 일본 국민은 그가 법적인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워낙 거물 중 거물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베파·기시다파 등 자민당 파벌 줄줄이 사라져
마침내 1976년 7월27일 도쿄지검 특수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나카를 뇌물수수 혐의와 외환법 위반 혐의로 전격 체포한 것이다. 뇌물 액수는 5억 엔. 물론 그와 관련된 항공사와 기업 등의 관계자들도 모두 구속됐다. 당시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일본 국민이었다. 워낙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다나카였기에 구속까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하던 것이 현실이 되자 그를 구속시킨 특수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살아있는 권력자, 최고의 실세를 과감히 구속시킨 특수부에 국민들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일본에선 당시 대유행어가 탄생했다. 이 유행어는 이후 한국에도 수입돼 지금 한국 정치인들도 남발하고 있다. 바로 “기억나지 않습니다”였다. 피고인 중 한 사람이었던, 다나카의 친구이자 국제흥업 대표인 오사노 겐지는 기자가 물어도, 검사가 물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연발했다. 그 이튿날 질문을 해도 그의 대답은 똑같았다.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직장인은 물론 아이들조차도 대답하기 곤란하면 무조건 이 말을 읊어대는 촌극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지금까지 이 말은 일본 정치인들이 곤란할 때마다 변명으로 내세우는 교과서적 멘트가 됐다.
그 후 도쿄지검 특수부는 이 여세를 몰아 리크루트 사건, 도쿄 사가와규빈 사건, 라이브 도어 사건 등을 수사하며 거침없이 거물 기업인을 구속시켜 전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자 국민 사이에서는 특수부에 한번 걸리면 유죄율이 무조건 99.9%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하지만 명성과 힘이 커지는 만큼 특수부의 무소불위 권력 폐해가 불거지기도 했다.
실제 2010년 2월19일 스즈키 무네오 의원은 당시 주간 아사히 보도를 근거로 외무성 국장에 대한 특수부 수사 과정에서 ‘고문·감금·협박’에 대한 실체를 해명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특수부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당시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검찰청 출입기자들도 특수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면 기자회견장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본 특수부의 뿌리가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 후 GHQ(연합국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의 지배를 받을 당시 미국이 만든 기구였던 만큼 미국 기관의 조종에 의해 다나카를 파멸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중·일 국교 정상화를 미국이 반대했음에도 다나카가 강력하게 밀어붙여 성사시킨 사실이 거론되기도 했다.
이렇듯 절대권력자나 거물 정치인, 기업인들을 가차 없이 수사해 구속시키던 도쿄지검 특수부가 근래 들어서는 그 예리함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이유는 살아있는 권력을 정면으로 겨누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 때문이다. 특히 모리 요시로와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부정 수뢰 혐의에 대해 애드벌룬만 띄우다 수사가 유야무야 그냥 넘어갔고, 최근에도 역시 통일교 정치자금과 자민당 정치인의 유착 문제가 한때 떠들썩했으나 아베 전 총리가 피살되자 슬그머니 잦아들어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하지만 최근 도쿄지검 특수부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비롯해 니카이 도시히로 등 자민당 파벌 수장 정치인들의 정치 비자금 문제를 수사하면서 다시 일본 정가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얼마 전 특수부는 2017~20년까지 3년에 걸쳐 기시다 총리가 3000만 엔의 정치자금을 미기재해 정치자금법 규정법 위반 혐의로 회계담당 비서를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3000만 엔의 정치자금을 은폐하라고 지시한 기시다 총리는 국민들에게 사죄해야 했다. 덩달아 국민의 기시다 내각 지지율도 20%대로 떨어졌다.
일본 집권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아베파의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본격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해당 의혹을 받는 의원실 관계자들이 줄줄이 조사를 받았다. 수사의 칼끝은 기시다 총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시다파도 수사 대상이 되면서 자민당은 충격에 휩싸였고, 결국 아베파와 기시다파를 비롯해 일본 정치의 근간이 되어 왔던 자민당 내 파벌들이 줄줄이 해산을 결정하는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매스컴 이용해 여론 살피고 수사하는 행태 보여”
물론 도쿄지검 특수부의 위용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일본 내 지적도 이어진다. 비록 집권 자민당의 파벌을 해산시키는 저력은 보여줬으나, 과거 다나카를 구속시켰듯 파벌의 수장들을 직접 겨냥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교도통신 서울지국장이었던 Y씨는 5월22일 인터뷰에서 그 원인으로 엘리트주의를 꼽았다. 과거에는 특수부 검사들이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려 위로 올라가려는 출세 지향적이었다면, 요즘은 그런 의욕이나 야망보다는 그냥 엘리트 의식에 빠진 샐러리맨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때문에 현재 기시다 정권의 정치자금 문제를 수사하면서도 기시다 총리를 향한 직접적인 수사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8년 차 일본 직장인인 사토 히로시(40)는 과거에 비해 특수부가 다소 정치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지검 특수부가 최고로 강한 조직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매스컴을 이용해 여론을 살피고 그다음 단계로 나가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특수부의 일반적 이미지는 과거에 절대권력자인 다나카를 끌어내 단죄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특수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특수부도 세대교체가 돼가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