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직구 금지’ ‘고령자 조건부 면허제’ ‘R&D 예산삭감’ 등 수없이 반복돼
수직적 당정 관계·쓴소리 못하는 국민의힘이 변해야 안정적 국정 관리 가능
5월9일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국민과의 소통 미흡과 체감하는 정책 변화의 부족’에 대해 사과하면서 향후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현장 기반의 민생토론회 재개와 국민과의 공감대 확대’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 기자회견에 대해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반성 없는 자화자찬’이라고 비판하면서 ‘국정 기조의 근본적인 전환’을 촉구했다.
대통령의 사과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5월20일, 대통령실이 ‘해외 직구 금지 정책’을 철회하면서 사과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정부는 국가인증통합마크(KC) 인증을 받지 못한 80개 품목의 해외 직접구매를 금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지 사흘 만에 번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야당이 비판해온 국정 운영의 난맥상이 현실화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이것은 당초 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 등으로 대표되는 C커머스의 품질 논란과 유해 제품의 안전성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소비자 선택권 침해’라는 비판 여론에 부닥쳐 “유해성이 확인된 제품에 한해 유통을 금지하겠다”며 뒤로 물러섰다.
정부는 관련 정책의 효과나 실현 가능성, 부작용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설익은 졸속 정책을 국민과의 공감대 없이 덜컥 발표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자유시장경제를 수호하겠다던 윤석열 정부가 “쇄국 정책을 펼치나”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유 외치는 尹이 쇄국 정책 펼치나” 비판
무엇이 정부 정책의 허점이었을까?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이 지적한 대로 “자유무역으로 성장하고 그 시스템 속에 살아가는 우리나라가 본질적으로 제품과 유통의 경쟁력을 어떻게 끌어올리느냐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채, KC 인증과 같은 얕은 수로 ‘차이나(중국) 침공’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미봉책이 아닌 국내 유통산업과 제품의 경쟁력을 강화할 근본적이며 종합적인 대책을 제시하는 게 적절했다.
정부는 정책 결정에 앞서 지난해 해외 직구액이 7조원에 육박한 만큼 가성비 높은 제품을 찾는 것은 소비자의 자유로운 권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또 국내 업계 보호를 내세워 소비자 선택권을 희생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논리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먼저 공감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정책을 발표해 놓고 스스로 번복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령자 조건부 면허제, 공매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주 69시간 근로, 수능시험 킬러문항 배제 등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R&D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밝혔지만 비판이 이어지자 예산 증액으로 변경했다. 또한 ‘고령 운전자격 제한’도 이동권 침해라는 비판이 일자 하루 만에 ‘고위험군 제한’으로 번복됐다. 각계에서 우려가 쏟아지는 이유다.
도대체 어떻게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길래 이렇게 비판을 받고 조변석개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일까?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일련의 정책 혼선은 개별적인 문제가 아닌 전체 연장선으로 볼 때, 심각한 국정 난맥상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국정 관리’(governance) 관점에서 이번 사태의 원인을 진단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게 필요하다. 반복되는 정책 혼선은 정책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려 자칫 정치적 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 ‘레임덕’과 ‘식물 대통령’ 같은 정치 파국을 맞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대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국정 관리’라는 학술적 용어는 정치권이 사용하고 있는 ‘국정 운영’이란 말처럼, 협의적 수준의 ‘여야 협치’라는 개념을 넘어 ‘국가-시민사회 간 협치’라는 광의적 차원의 협치를 말한다. 국정 관리란 보통 세계화, 정보화, 탈냉전화 등으로 표현되는 21세기 시대 상황에 부합하는 ‘국가의 새로운 통치 양식’으로서 정당 등 정부 내 행위자뿐만 아니라 정부 이외의 시민단체, 이익단체 등 다양한 행위자를 국정 운영 과정에 참여시켜 협력과 성과를 증진하는 방식이다.
‘국가-시민사회 간 협치’ 국정 관리 필요
윤 정부에 ‘여야 협치’라는 협소한 수준의 국정 운영보다는 ‘국가-시민사회 간 협치’라는 국정 관리가 필요한 이유는 뭘까? ‘의·정 갈등’에서 보듯이, 정부가 추진하는 교육·노동·연금·의료 등 4대 개혁의 성공 가능성이 녹록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예상되는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개혁이 좌초할 수도 있다. 때문에 이해관계자들이 개혁에 저항하지 않고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효율적인 협치 양식’을 찾는 국정 관리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도 “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적을 많이 만드는 일로, 뭔가를 빼앗기는 쪽에서는 정말 정권 퇴진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언급했듯이, 개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의사, 노동자, 학부모 집단 등 시민사회와의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관리하지 못한다면 정책 실패는 물론 정부 실패로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다.
역대 대통령 중 국정 관리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한 정치인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는 정부 출범 초기부터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추진’ ‘이라크 파병’ ‘화물연대 파업’ 등으로 국정 운영의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는 대안으로 ‘시스템 국정 운영’이란 개념을 정립해 시민사회와의 협치를 위해 국민참여수석실, 시민사회수석실, 정부 내 각종 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리고 2003년 9월에는 ‘수평적인 당·정·청 관계’를 위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기까지 했다.
윤 정부에서 설익은 졸속 정책이 반복되니 ‘조변석개·우왕좌왕·탁상행정’이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국정 관리의 관점에서 볼 때, 윤 대통령의 즉흥적인 지시가 졸속 정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는 점에서 ‘수직적인 당정 관계의 문제’나 ‘용산 대통령실 중심의 국정 운영의 문제’가 지적될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여당이라면 민심에 기반해 쓴소리를 내야 했지만, 국민의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동안 여당은 당정 협의를 통해 사전에 정책 오류를 거르지 못하고 뒷북 비판에 머물기 일쑤였다. 해외 직구 문제만 하더라도, 국민의힘은 정부의 일방적 조처에 대해 국민의 이해를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당정 협의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나는 처음 들은 것이고, 정부에서 당에 실무적으로 뭘 갖다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정 협의를 한낱 요식행위로 여긴 정부 책임이 크지만, 여당 또한 문제가 크다. 여당의 수동적 자세부터 바꿔야 한다.
이제라도 여당이 정책 실패를 줄이고 안정적인 국정 관리에 성공하려면, 수직적인 당정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당정이 국정 관리 개념을 도입해 수평적인 당정 관계로 정책의 효과성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졸속 정책이 반복되면서 결국 정부실패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실패하는 정부로 가지 않기 위해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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