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걸린 조국·황운하·이화영 1심, 정치 지형 바꾸는 결과로 이어져
민사 지연은 국민에 금전적 손해 끼쳐...법조 일원화로 판사 수급도 힘들어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해 12월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각오를 다진 대목은 ‘재판 지연 해결’이었다. 이후 그는 취임식에서 ‘신속’이란 단어를 3번 썼고, 4월25일 법의 날 기념식에서도 신속 재판을 사법부의 사명으로 꼽았다. 사실상 빠른 재판 진행을 내걸고 사법부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그의 취임 일성은 각급 법원에 얼마나 울려 퍼졌을까.
4월21일 수원지방검찰청은 이례적으로 긴 A4 용지 두 장 분량의 입장문을 냈다. 여기에는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판사 전원 기피신청 등 재판을 늦추기 위한 전략이 상세히 나열돼 있었다. 최근 이 전 지사가 꺼낸 ‘술판 회유’ 주장과 관련해서는 “재판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2022년 10월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 전 지사의 재판은 현재까지 1년 반 넘게 진행 중이다. 1심 선고는 6월7일 내려질 예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검찰이 비판 성명을 내긴 했지만, 이 전 지사의 재판 지연은 피고인에 휘둘려 우왕좌왕하는 사법부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꼬집었다.
국회 임기 시작 직후 기소된 윤미향, 4년 다 채울 판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재판 지연은 정치 지형을 뒤바꾸는 결과로 이어졌다. 2019년 12월 자녀 입시비리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 대표는 3년여 만인 지난해 2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또 1년 만인 올해 2월 항소심에서 같은 형이 내려졌다. 결국 상고심으로 가면서 법원은 4년 넘게 형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조 대표는 그사이 4·10 총선에서 당선됐고, 12석을 차지하는 원내 3당 수장으로 올라섰다.
조국혁신당 원내대표로 선출된 황운하 의원의 경우 기소된 지 거의 4년 만인 지난해 11월에야 1심이 열렸다. 그는 여기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이 사실상 ‘징역 중 당선’을 묵과한 셈이다. 이들은 김명수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최종심을 내릴 법봉은 조희대 대법원장의 손에 쥐어졌다. 최종심 선고 시기는 신속 재판을 천명한 그의 의지를 평가할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흔히 정치인의 재판 지연 사례를 얘기할 때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이가 무소속 윤미향 의원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후원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윤 의원이 기소된 시점은 2020년 9월이었다.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되자마자였다. 1심 선고는 무려 2년5개월이 지난 2023년 2월에 이뤄졌다. 2심 판결은 그로부터 7개월 만인 지난해 9월 나왔다. 당시 2심에서 윤 의원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에 의해 형이 확정되면 당선 무효에 해당하지만 7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선고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사실상 4년 임기를 모두 채우게 될 상황이다.
이처럼 사법부의 현안에 대한 척도가 정치인의 재판이 되는 경향이 있지만, 재판 지연이 비단 정치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전국 법원에서 판사 3명이 재판하는 민사합의 사건의 1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평균 14개월이 걸렸다. 2019년 9.9개월에서 매년 늘어났다. 민사합의부로 넘어가는 소송가액 2억원 이상의 송사를 제기하는 경우 1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는 민사소송법 199조는 사문화된 지 오래다.
이는 국민의 금전적 손해를 가중시킨다. 소송가액 2억원에 대한 예금이자를 계산해 보면, 민사합의 사건이 1년 지연될 때마다 연 700만원(4월 시중은행 평균 예금이자 3.5% 적용)의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또 2022년 민사합의 건수 중 2년 넘게 심리 중인 미제사건은 예년보다 900여 건 증가한 6063건이다. 산술적으로 따져보면 민사합의 미제사건 당사자는 기회비용으로 최소 848억원을 잃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소송에서 금전채무 불이행 시 채무자가 물어야 하는 지연손해금도 숨은 변수다. 소송촉진법상 지연손해금에는 연 12%의 이율이 붙는다. 1심 결과에 불복한 후 늑장 재판이 이어지면 사채 이자에 버금가는 이자폭탄을 맞게 되는 것이다.
말라가는 ‘젊은 피’…판사 늘리고 AI 도입해야
재판 지연의 주요 원인은 판사 부족이다. 판사 정원은 2014년 판사정원법이 개정 시행된 이후 10년째 3214명으로 고정돼 있다. 2022년 민·형사 1심 접수 건수가 96만4031건이니, 판사 한 명이 처음 본 사건만 평균 약 300건이란 뜻이다. 주말과 공휴일을 빼고 매일 1건씩 처리해야 소화할 수 있는 규모다.
이 같은 격무로 인해 판사가 대규모 이탈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올 1월에는 법관 정기인사를 앞두고 ‘허리급’인 고등법원 판사 12명이 무더기 사표를 냈다. 법복을 벗은 고법 판사와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작년 한 해에만 61명으로 2019년(33명)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법관 결원은 경력 법조인으로 메워지지만, 앞으로는 그마저 충원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다양한 경험을 지닌 법조인을 법관으로 선발하기 위해 2013년 도입된 법조 일원화 정책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법조 일원화 정책의 단계적 적용에 따라 내년부터는 판사 임용 법조 경력 요건이 5년에서 7년으로 늘어난다. 통상 3년간 군법무관을 지내고 7년째 변호사로 활동한 법조인은 법관 임용 시 7호봉 대우를 받는다. 7호봉 월급은 올해 기준 555만원이다. 여기에 각종 수당을 합하면 연봉은 1억~1억2000만원 선이다. 2021년 국세청 종합소득세 신고액 기준 변호사의 연평균 소득인 1억1500만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급여가 비교적 낮은 중소 로펌 변호사에게는 법원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문제는 실력이다.
7~10년 법조 경력자 중 법관 지원자 수는 지난해 176명을 기록했다. 여기서 임용된 사람은 15.9%인 28명에 불과했다. 판사 적격 인원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걸 시사한다. 김주영 법무법인 한누리 대표변호사는 작년 7월 법원행정처 학술토론회에서 “전문지식과 성품 면에서 우수한 지원자가 충분하지 않아 좋은 법관을 선발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젊은 피’ 수혈이 힘들어지면서 남은 판사는 점점 고령화되고 있다. 2015년 40대로 접어든 법관의 평균 연령은 2023년 44.6세로 증가했다. 이러다 보니 체력적인 부분도 재판 지연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해결의 실마리는 판사 증원이다. 다행히 판사 정원을 5년에 걸쳐 370명 늘리도록 한 ‘판사정원법 개정안’이 5월7일 국회 법안소위를 통과해 이달 말 본회의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 최근 법원행정처가 각급 법원의 행정직인 사무국장에게 사법 업무를 처리하는 사법보좌관을 겸임하도록 함으로써 신속 재판을 유도했다. 기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뒤따랐다. 강민구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시사저널에 “판결 결론은 판사가 내리고 판결 이유와 근거 작성은 AI(인공지능)에 맡겨야 한다”며 “재판 과정에서 제출된 수많은 자료가 레고 블록이라면 AI는 레고를 조립해 주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