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사과’는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월7일 KBS를 통해 방영된 새해 맞이 특별 대담에서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사건에 대해 ‘정치 공작’이라는 평가를 내놓으며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고 아쉽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이 정부에서 ‘사과’는 정녕 기대난망의 금기어가 되어버린 것일까. 결국 많은 사람이 바랐던 사과는 나오지 않았고, 그 자리는 ‘아쉽다’라는 유감의 표현이 차지했다. 아울러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명품백(디올백)이 대담 진행자에 의해 “이른바 파우치, 외국회사의 뭐 조그마한 백”으로 쪼그라드는 일마저 벌어졌다. 그렇게 우리 국민들의 관심을 끈 문제는 이번에도 말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채 찜찜함을 남기며 또 한번 흐지부지 넘겨졌다. 대신 정작 중요하지 않은 ‘갈등’ ‘암투’ 같은 곁다리 이슈들만 끊임없이 부각되며 우리 정치를 흔들고 있다.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사이에서 빚어졌던 갈등을 두고 2차, 3차전을 예고하는 논평들이 이어지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 두 사람이 잠시나마 마찰을 빚은 일련의 과정은 어찌 보면 대중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고루 담고 있다. 서로 가까웠던 사람끼리 싸우는 모습을 그리는 주말 드라마 같은 얼개도 갖추고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충분히 끌 만했다. 다만 액션 장르를 닮은 이런 유의 장면에서 빠른 스토리 전개와 강렬한 액션 등에 시선을 뺏기다 보면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 망각하기 십상이다, 때로는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지 헷갈리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 사이에 있었던 갈등 드라마도 이와 다르지 않다. 둘 사이의 승패를 따지는 기사들이 많아지고 그에 쏠리는 눈길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갈등과 대립의 진짜 원인은 오히려 묻힐 가능성이 크다.
한동훈 위원장은 취임 후 첫 비대위원회 회의에서 “우리 내부에서 궁중암투나 합종연횡하듯 사극을 찍는 식의 삼국지 정치는 하지 말자”라고 말했지만, 현실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안타깝게도 그와 정반대다. 정작 의미 있는 사과는 빠진 채 갈등과 화해의 과정만 크게 부각되는 이 상황은 민심과도 한참 동떨어져 있다. 게다가 둘 사이의 갈등이 봉합되는 계기를 제공한 현장이 하필이면 큰 화재로 잿더미가 된 서천시장 한복판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하다.
한 위원장이 직접 거론한 ‘궁중암투’나 ‘삼국지 정치’ 같은 권력투쟁보다는 차라리 권선징악의 단순한 플롯으로 진행되는 서부영화 같은 활극이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깔끔하고 흥미롭게 다가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에 반해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암투나 사사로운 이익을 얻기 위해 벌이는 배신·배반 그리고 그에 대한 응징으로 얽히고설키는 빤한 복수혈전은 자칫 따분하거나 불쾌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총선 유불리를 떠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명품백 사건으로 더 깊어진 ‘김건희 리스크’는 두루뭉술하게 넘긴다고 민심의 바다에서 쉽사리 가라앉을 사안이 아니다. 당장 이번 설 연휴를 맞아 마주 앉은 가족·친지들 사이에서도 그와 관련된 얘기는 빠지지 않고 오르내렸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라고 했고, 한 위원장은 ‘국민의 눈높이’를 강조했는데 이미 국민의 67%는 설 직후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명품백과 관련한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적절치 않았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이보다 분명한 방향 지시가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