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키즈’ 박인비 리우올림픽 금메달, 한국 골프 발전 50년은 앞당겼다
“우리 애도 지금부터 골프를 배우면 될까요?”
한국의 에이스 박인비(28·KB금융그룹)가 브라질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주니어 골프’에 변화 바람이 일고 있다. 박세리(39·하나금융그룹)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대회 US여자오픈에서 ‘맨발의 신화’를 이룰 때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세리키즈’로 시작한 박인비가 ‘인비천하’를 만들면서 ‘인비키즈’ 시대로 바뀌고 있다.
세계적인 골프선수들은 대개 클럽을 8~12살에 잡는다. 물론 아주 어릴 때인 3~4살부터 잡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골프를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박인비의 리우올림픽 금메달 소식에 주부들이나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하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 애가 골프를 시작하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을까.”
한국인이 느끼는 올림픽은 남다르다. 메달을 따기 위해서 ‘올인’한다. 4년을 기다리다가 다시 4년을 담금질한다. 은퇴하기 전까지 메달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개인의 영광’이자 ‘가문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메달을 손에 쥐면 명예뿐 아니라 두둑한 포상금과 연금까지 따라온다. 그러니 누가 목숨을 걸지 않겠는가.
“한계를 넘고 나서 받은 보상이라 더 행복”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한국은 선진국에서 즐기는 운동의 경우 메달권에서 다소 멀다. 이번에도 대부분의 금메달을 양궁을 비롯한 특정종목에서 획득했다. 그런데 여기에 골프가 포함됐다. 강국이 즐기는 골프가 언제든지 우승하고 메달이 가능한 종목이 된 것이다.
박인비는 금메달리스트에 오른 뒤 “내 한계를 넘고 나서 받은 보상이라 더 행복하다”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실제 박인비의 이번 메달은 조금 특별하다. ‘투혼’이 거둔 영예로운 선물이라서다. 손가락 인대 손상으로 출전을 포기할 뻔했던 박인비는 대회 4일간 남편 남기협씨의 도움을 받아 밤새 얼음찜질을 하며 진통을 이겨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잠을 설치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저절로 났다고 한다.
그런 그가 8월21일 브라질 리우올림픽 골프코스에서 막을 내린 2016 리우올림픽 여자골프에서 세계여자골프랭킹 1위 리디아 고(19·캘러웨이)를 은메달로 밀어내고 금메달을 땄다. 116년 만에 한국은 물론 세계 골프사를 바꿔놨다. 4대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에 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커리어 골든 슬램’을 달성한 것이다.
박인비는 올림픽 대표선수로 선발된 후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즌 초 허리 부상에 이은 왼손 엄지손가락 손상으로 우승은커녕 메이저대회 컷오프에 이어 대회마다 불참하는 등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특히 그를 비방하는 ‘악플’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출전한다고 하지 말았어야지. 올림픽 카드 한 장만 날렸다’ ‘국민의 세금으로 리우에 가면서 세금만 축낸 것 같다’ 등 각종 비난 글이 쏟아졌다. 게다가 올림픽을 2주 앞두고 2개월 만에 실전 감각을 익히기 위해 출전한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에서 컷오프를 당하며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인비키즈’ 주니어 늘어날 것으로 기대
박인비의 골프 인생은 출발부터 화려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고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주니어 시절 이미 그린을 평정했다. 하지만 그도 프로에 데뷔하고 나서 골프가 싫을 정도로 슬럼프를 겪었다. 박인비는 2008년 US여자오픈을 제패하며 유망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후 부진에 빠지며 골프팬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너무 어린 나이에 메이저대회 우승이라는 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탈출구로 선택한 것이 일본이다. 일본프로골프(JLPGA) 투어에서 활동하다가 2012년 LPGA 투어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오르며 미국 무대로 복귀했다.
2013년 혼다 LPGA 타일랜드에서 시즌 첫 승을 올린 그는 이후 크라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현재 ANA 인스퍼레이션), LPGA 챔피언십, US여자오픈을 차례로 제패하며 한 시즌에 무려 3개의 메이저대회에서 정상에 오르며 존재감을 다시 확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2014년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컵을 안은 그는 2015년 LPGA 챔피언십에서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더니 브리티시여자오픈까지 제패, 5개 메이저 우승컵을 모두 손에 쥐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그가 지난해까지 올린 성적은 놀랍다. 메이저대회 7개를 포함해 LPGA 투어 우승 타이틀이 17개나 된다. 올해 우승 없이 지난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1라운드를 마치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된 배경이다.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던 것은 박인비의 지혜로움이 큰 몫을 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데다 큰 대회에서 우승한 경험이 조화를 이루며 쾌거를 이룬 것이다. 그는 불리한 조건을 모두 극복했다. 이번 대회에서 함께 플레이했던 선수들보다 늘 거리가 덜 나갔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음 샷을 위해 최적의 페어웨이 랜딩존을 찾았다. 벙커와 워터해저드 방향은 절대로 피했다. 링크스의 까다로움과 타수에 결정타를 주는 위기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묘책이었다. 벙커만 해도 모래 종류가 3가지나 돼 한번 빠지면 타수를 잃을 게 뻔했다. 그리고 드라이버와 우드로 볼을 보낼 만큼 보낸 뒤 그린 주변에서 자신의 강점인 쇼트게임과 퍼팅에 모든 것을 걸었다. 운도 따랐다. 리디아 고가 번번이 홀을 놓치는 사이에 그의 6~12m 중장거리 퍼팅이 홀을 파고들었다. 머리 좋은 박인비가 세운 코스 매니지먼트의 완벽한 승리였던 셈이다.
박인비의 금메달은 메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세리키즈’로 자라나 올림픽 기간 동안 감독 박세리와 한솥밥을 먹으면서 귀중한 메달을 한국에 안겼다. 또한 스포츠가 가진 위대한 ‘힐링’을 국민 모두에게 선사했다.
이번 박인비의 금메달은 한국 골프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골프인구를 증가시킬 것이다. 특히 선수층을 두텁게 할 주니어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박세리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인비키즈’를 양산하며 한국 골프계의 발전을 50년 정도는 앞당기지 않을까 싶다. 4년 뒤 열리는 2020년 도쿄(東京)올림픽에서 누가 금메달을 딸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