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망 없는 지지’가 아베 발목 잡아…압승했으나 곳곳에 불안 요소
“일본은 다른 많은 민주 국가 중에서도 심각한 정치적 리더십 부족을 겪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를 가진 제럴드 커티스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는 이번 일본 중의원 선거 결과를 두고 쓴소리를 토해냈다. 왜 그랬을까.
12월14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 결과를 보면 자민당은 291석을 얻어 과반 의석을 넘겼다. 연립정부 파트너인 공명당이 얻은 의석수가 35석으로, 둘이 합친 326석은 개헌이 가능한 3분의 2(317석) 선을 훌쩍 넘어섰다. 정치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베 총리의 실각 같은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이변이 없는 한 2018년까지 아베 총리가 자리를 유지할 것으로 본다. 가장 큰 이유는 대안 없는 야당 때문이다. 가미쿠보 마코토 리쓰메이칸 대학 정책과학부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현장도, 기업도, 아베노믹스의 본질이 ‘모르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도 일단 한숨 쉴 여유를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다.”
선거 승리가 확정된 12월14일 밤, 아베 총리는 자민당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헌법 개정은 자민당의 비원이며, 창당 이후의 목표다. 다만 헌법 개정은 중·참의원 양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당장 추진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개헌 추진 시기는 2016년 7월 이후로 본다. 121석이 물갈이되는 참의원 선거 이후를 노릴 것이라는 얘기다. 그 선거에서 압승하기 위해 “일단 지표가 나빠진 경제를 먼저 재건하는 게 우선”이라는 이야기가 총리 측근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에게 현 상황이 매우 유리한 전개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속되려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아베노믹스가 좌초하지 않아야 한다. 경제만 파국을 맞지 않으면 국민이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자민당은 갖고 있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경제 실험에 대한 전문가들의 기대치는 낮다. 2차 소비세율 인상 시기를 늦추면서 부각된 정부 부채는 일본 경제 규모의 2배가 넘는다. 일본 재무성 자료에 따르면, 2013년 기준 GDP(국내총생산)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227.2%를 기록했다. 아베 총리는 이 부채를 2020년까지 해결하겠다는 뜻을 중의원 해산을 표명하는 자리에서 밝혔다. 다케로 도이 게이오 대학 경제학부 교수는 “부채 해결을 위한 방안을 수립하겠다는 뜻은 해산을 표명할 때도 언급했고 이번 총선에서 자민당의 공약에도 명시했다. 이제는 무조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2020년까지 재정 수지를 흑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11조~16조 엔에 달하는 적자를 줄이는 계획이 필요하다. 물론 달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총리 관저의 정치적 판단과는 거꾸로 가야 한다는 게 문제다. 다케로 교수는 “증세를 피하고 싶다면 세출 삭감을 대규모로 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사회보장 혜택에 메스를 대야 한다. 그러나 자민당 내에는 다양한 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사회보장 혜택의 대폭적인 삭감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 사회보장 이외의 지출을 줄이려 해도 마찬가지로 그것에 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고 지적한다. 사회보장 혜택을 줄이지 못한다면 소비세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과거 정부가 매번 시도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봤던 방법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이러한 쟁점에 대해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 아베 내각이 ‘연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재정 책임은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다.
“아베가 오바마 대신 공화당 상대할 가능성”
경제 상황은 일본의 대외 관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제럴드 커티스 교수가 예견하는 시나리오 중 하나를 들어보자. “만약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의 정책이 실패로 끝나고, 디플레이션이 뿌리 깊은 문제로 남아 있게 되면, 일본 정부의 성장 전략이 활기를 잃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채권 위기와 금리 상승, 외국인 투자자의 철수가 일어나고 주가는 하락할 것이다. 아베 총리의 임기가 끝나는 2018년까지 그의 인기는 침체될 것이고, 후임자는 정권 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매파 자세를 강화하고 국가주의적 정책으로 국민의 지지를 높이려 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런 우려가 미국 내에서 나오는 가운데서도 백악관은 일단 아베 총리의 승리에 대해 환영한다는 논평을 냈다. 이건 그들의 진심에 가깝다. 일본 연립여당의 압승은 대미 노선의 지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일 양국의 냉각 기간이 길어지는 것을 우려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독일 사례를 들어가면서까지 아베 총리에게 한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해줄 것을 촉구했다. 문제는 이 지점에 대한 아베 총리의 대처다. 미·일 관계의 기본 노선을 크게 바꾸지는 않겠지만, 대처법에는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미국 내에서도 제기된다. 지난 11월 중간선거 이후 미국 상원의 모든 위원회 위원장은 공화당 차지가 됐다. 외교·안보를 다루는 외교위원회 위원장은 밥 코커 의원(테네시)이,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존 매케인 의원(애리조나)이 맡았는데, 모두 대중(對中) 강경파면서 지일(知日)파다.
특히 외교위원회 중 동북아시아 정책에 영향력을 가진 동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은 대중 강경파인 마르코 루비오 의원(플로리다)이 맡았는데, 이미 아베 총리와 올해 1월 회담을 가진 지일파다. 이런 인적 구성 때문에 “아베가 레임덕에 시달리는 오바마를 상대하지 않고 공화당 집행부와 직접 접촉할 가능성이 있다. 공화당의 주요 포스트 대부분은 자민당에 유달리 호의적이기 때문이다”(도널드 카이저 전 국무차관보 대리)는 전망도 있다. 미국 외교의 우선순위에 들어 있는 동북아시아의 긴장 완화를 거스를지도 모를, 이럴 가능성은 아베 정부의 앞길에도, 미국 정부에도 경고등이 될 수 있다.
자민당에 몸담고 있지만 그의 생각은 곳곳에서 자민당 주류와 부딪친다. 경제정책과 원전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아베 정부와 반대되는 주장을 편다. 특히 아베노믹스에 회의적인 점이 주목받고 있다. ‘당내 야당’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지금도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이나 지방을 방문하는 신지로 의원은 자신의 체감을 근거로 “아베노믹스의 효과가 지방까지 파급되어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총선 직후 당내 중진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인물로 부상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신지로 의원이 머지않아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민당 주류와 결별한 뒤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처럼 “자민당을 부순다!”고 외치며 큰 파도를 만들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강력한 원군은 엄청난 대중적 인기다. 2012년 선거 때 자신의 지역구인 가나가와 11구에서 얻은 득표율은 전국 최고인 79.86%로, 아베 총리(78.16%)보다 높았다. 이번 선거에서는 무려 83.28%를 올려 전국 최고 득표율 기록을 경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