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뺑뺑이’ 인정 안 하는 정부…위협받는 ‘국민 건강권’ [유창선의 시시비비]
길어지는 의료 공백 사태…윤 대통령의 요지부동은 소신인가 고집인가
“이제 의대 증원이 마무리된 만큼 개혁의 본질인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 8월29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브리핑에서 밝힌 입장이다. 정부가 추진해온 의료 개혁을 원안대로 추진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힌 것이다. 이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의·정 갈등 중재안으로 제안한 ‘2026학년도 의대 증원 유예’를 사실상 거부한 것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은 추석 연휴를 앞둔 의료 공백 우려에 대해서도 “의료 현장을 한번 가보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며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일단 비상진료체계가 그래도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고, 정부도 열심히 뛰고 있다. 현장의 의사, 간호사, 또 간호조무사를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서 정말 헌신적으로 뛰고 계시고 있다”고 비상진료체계에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의료 공백에 대한 불안과 우려 여론이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기존 입장에서 조금도 물러서거나 타협할 기미가 없어 보인다. 의료 개혁 문제에 관한 윤 대통령의 입장이 워낙 확고해 대통령실과 정부 내에서 다른 얘기를 꺼낼 분위기가 되지 못한다는 말도 전해진다. 대통령실은 9월2일에도 다시 한번 입장을 밝히면서 “응급의료 공백 문제는 의사 부족으로 수년간 누적된 문제”라며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국민 생명권과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의료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비상진료체계에 “문제 없다”는 윤 대통령
대신 정부는 응급실 대란을 막기 위해 응급실 운영이 일부 제한된 의료기관에 15명의 군의관을 9월4일자로 배치하고 9일부터는 약 236명의 군의관과 공중보건의사를 위험기관 중심으로 집중 배치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내 소중한 가족이나 친지들이 어떤 의료 공백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이런 일들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박민수 복지부 2차관)는 정부의 다짐에도 현재의 의료 공백 상황을 보는 시각은 크게 엇갈린다.
전국의과대학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응급실은 전문의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이 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 발표와 다르게 이미 많은 응급실은 정상적인 진료를 못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9월1일(기준) 전국 57개 대학병원 응급실 중 분만이 안 되는 곳은 14개, 흉부대동맥 수술이 안 되는 곳은 16개, 영유아 장폐색 시술이 안 되는 곳은 24개, 영유아 내시경이 안 되는 곳은 46개 대학병원”이라며 여러 병원이 응급실을 일부 닫았거나 닫으려는 계획이 있다는 사실도 알렸다.
병원 현장에서 전해지는 소식도 단순하지 않다. 의료진 부족으로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를 겪던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는 소식들이 들려온다. 2세 여아가 열경련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수도권 서부 지역 병원 11곳으로부터 진료 거부를 당해 의식불명에 빠진 일도 뒤늦게 알려졌다. 제때 수술이나 시술을 받지 못하고 대기하는 중증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상황도 들려온다. 그러니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를 찍었던 보수층조차도 분개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상황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응급실 뺑뺑이’로 사망자가 증가했다는 주장에 대해 “명확한 근거 없는 주장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응급 의료현장을 지키고 있는 의료진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고, 불필요한 국민 불안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반박한다. 정부는 응급실 상황이 우려할 정도가 아니며, 증원을 통해 의사 인력 수급 균형을 맞춰야 응급실 진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의료계는 여전히 의대 증원을 중단하는 것이 사태 진정의 유일한 해법이라는 입장을 마찬가지로 고수하고 있다. 접점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평행선이다.
이런 가운데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8월26일부터 30일까지 18세 이상 유권자 25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평가 응답 비율은 전주 대비 0.4%포인트 낮아진 29.6%를 기록했다. 8월 2주 이후 3주 연속 하락한 수치이고, 취임 이후 두 번째로 낮은 지지율이다. 반면 부정평가는 8월 2주 이후 3주 연속 상승해 긍정평가와 부정평가 간 차이는 무려 37.1%포인트나 된다(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0%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리얼미터 관계자는 “장기화된 의·정 갈등으로 ‘응급실 의료 공백’이 현실화됨에 따라 대정부 신뢰감이 힘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정부 신뢰 하락하니 대통령 지지율도 추락
당초 의료 개혁은 국민의 지지를 받던 의제였다. 그러나 의대 증원에 대한 의료계의 강한 반발로 의료 공백 사태가 초래되고, 정부와 정치권이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환자와 국민만 고통받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당초 환자들을 버려두고 병원을 떠나는 전공의들에 대한 비판 여론도 컸지만, 사태가 악화되어도 원안만 고수할 뿐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정부의 모습에 대한 비판 여론도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다.
이제는 누구의 입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대타협이 절실한 시점이 됐다. 환자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해 속절없이 고통받는 상황은 그동안 의료 선진국임을 자부했던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9월1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회담에서 “추석 연휴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만전을 기할 것을 정부에 당부하고 국회 차원의 대책을 협의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긴 공동 발표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후 여야는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의견을 모으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가 평행선만 달리며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면 여야가 국회를 통해서라도 제3의 해법 마련에 나서야 할 판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한동훈 대표의 중재안을 거부한 상황이라 여당이 운신할 수 있는 폭도 넉넉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환자와 국민의 고통이 반년 넘도록 장기화된 작금의 상황을 무한 방치할 수는 없다. 대통령과 의료계의 평행선 속에서 위협받는 것은 국민의 건강권이다. 아무리 취지가 옳다 해도 눈앞에서 환자들이 고통받는 현실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좋은 정책이 될 수 없다. 윤 대통령은 “의료 현장을 한번 가보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고 했지만, 거꾸로 그 말을 윤 대통령에게 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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