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째 등장한 ‘반국가세력’…尹 ‘이념전’ 재시동에 보수는 결집할까
尹, ‘반국가세력’ 또 다시 언급…북한과 야권 겨냥했다는 해석 낮은 지지율·김경수 복권 논란에 ‘보수 결집·정통성 확보’ 꾀해 ‘민생·중도’ 강조 한동훈과 엇박자…“오히려 지지율·韓에도 부담”
“우리 사회 내부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북한은 개전 초기부터 이들을 동원해 폭력과 여론몰이, 선전·선동으로 국민적 혼란을 가중하고 국민 분열을 꾀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안 사용하지 않던 ‘반국가세력’ 표현을 19일 다시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국무회의서 북한의 도발에 대한 확고한 대비를 강조하며 나온 말인데, 정치권에선 야권도 함께 겨냥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각종 이념 논란 속 보수층을 결집하고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한 시도로 읽히지만 국정 파트너인 여당에도 부담을 주는 ‘철 지난 색깔론’이란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실은 20일 윤 대통령의 전날 발언 속 ‘반국가세력’이 “북한의 위협”을 지칭한 것이었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 내부에 암약’ ‘북한이 이들을 동원해’ 등의 메시지를 봤을 때, 정부의 대북·안보 정책에 반대하는 ‘국내 세력’을 의미한다는 데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취임 후 10차례 가까이 언급…‘반국가세력=야권’ 해석도
윤 대통령은 야권과 대북·외교·안보 정책으로 대립할 때마다 ‘반국가세력’이란 용어를 소환해왔다. 그 시작은 취임 첫 해인 2022년 10월 여당 원외당협위원장 초청 오찬에서였다. 당시 “북한을 따르는 주사파는 진보도 좌파도 아니다. 적대적 반국가세력과는 협치가 불가능하다”며 야당과의 협치 불가를 선언한 바 있다.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 임명을 두고 갈등을 빚던 때였다.
이듬해에는 ‘반국가세력’ 사용 빈도가 더욱 늘었고 또 강해졌다. 지난해 6월 한국자유총연맹 창립 기념식에선 “반국가세력들이 북한 공산집단에 대해 유엔 안보리(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풀어달라고 읍소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다”며 사실상 문재인 정부를 겨냥했다.
두 달 후인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며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인권 운동가·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 했다. 이는 야권 등 국내 진보 세력을 총칭한 것으로 해석됐다. 같은 달 28일엔 국민의힘 연찬회를 찾아 “이념이 최우선 가치”라며 이념전을 선포하기도 했다.
9월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식 등에선 “반국가세력은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한미일 협력 체계가 한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가 한창이던 때, 이를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본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정치적 반대를 ‘이견’이 아닌,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국가 정체성’의 문제로 규정하면서 통합의 여지는 한층 좁아졌다.
지난해 10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서 참패한 후 한동안 이념 관련 발언을 자제하고 민생을 앞세웠던 윤 대통령은 다시 총선 한 달여 전인 지난 3월 다시 “반국가세력들이 국가안보를 흔들고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천안함 침몰 14주기를 맞아 북한의 폭침을 부정하는 일각을 비판한 것이었지만, 총선 패배 위기에서 지지층 결집을 위한 발언이었다는 해석이 나왔다.
김경수 복권 논란 맞물려 ‘보수 정통성’ 강화 행보
5개월여 만에 나온 이번 ‘반국가세력 암약’ 발언도 저조한 국정 지지율과 거대 야당의 득세 속 보수 결집을 노렸다는 분석이다. 특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논란과 건국절 제정 진위 논쟁을 두고 광복회와 야권의 공세가 이어지자 안보를 연결고리로 지지층 결집을 도모하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20%대 후반~30%대 초반에서 좀체 반등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국면 전환을 노린 윤 대통령의 ‘이념’ 행보는 되레 지지율 하락을 부추기는 모양새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2~16일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200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30.7%로 집계됐다. 일주일 전 조사보다 2.9%포인트 떨어진 수치로, 김형석 관장 인선 공방과 광복 사관 대립이 오히려 국정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리얼미터는 분석했다.(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2.2%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고)
‘이념’과 ‘색깔론’을 앞세운 윤 대통령의 언행이 자신의 ‘보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도 나온다.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최근 김경수 전 경남지사 복권으로 보수 일각에서 ‘친문 뿌리설’까지 제기되는 만큼 이를 타개하기 위해 더욱 우클릭하는 거란 지적이다. 실제 윤 대통령은 김 전 지사 복권과 맞물려 고(故) 육영수 여사를 참배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 부부와 만찬 일정도 가졌다.
이러한 윤 대통령의 ‘이념 행보’에 야권은 “국민 갈라치기”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20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잇따른 친일 매국 자태로 국민적 질타에 몰리자 색깔론으로 상황을 모면해보겠다는 것이냐”며 윤 대통령을 저격했다. 노종면 민주당 원내대변인도 전날 논평을 통해 “광복절을 기해 식민사관에 물든 친일 정권임이 드러나자 이제는 북풍몰이 카드를 꺼냈다”고 꼬집었으며, 같은 날 김보협 조국혁신당 수석대변인도 “윤 대통령의 이념 타령은 이제 좀 지겹다”고 비판했다.
“‘민생’ 앞세운 한동훈에도 장애물”…尹에 ‘거리두기’하는 與
‘민생 드라이브’를 시도하고 있는 여권에서도 이 같은 대통령의 행보를 부담스러워하는 기류가 감지된다. 국민의힘 한동훈 지도부가 ‘중도 확장’과 ‘국민 눈높이’를 강조하는 가운데, 용산의 ‘우클릭’이 민심 확보에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와 달리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의 ‘반국가세력’ 발언에 그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고 거리두기에 나서고 있다.
당내에선 이미 윤 대통령의 ‘극우 인선’과 ‘광복절 논란’ 등에 대해 공개적인 우려가 나오던 차였다. 한 대표가 임기 초 당정 갈등을 최소화하고 있지만, 이러한 엇박자가 지속될 경우 머잖아 직접 충돌이 불가피할 거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 경우 윤 대통령이 결과적으로 얻고자 했던 ‘보수층 결집’은 더욱 요원해진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의 ‘이념전’ 재시동은 방식과 타이밍에서 모두 ‘잘못된 카드’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이날 통화에서 “일단 중요한 선거도 당장 없는 상황에서 보수층 결집을 위해 이런 퇴행적인 수단을 꺼내드는 것이 지지율은 물론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한동훈 대표에게도 부담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윤 대통령의 화법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반국가세력’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계속 남겨 논란을 키우는 게 문제”라며 “차라리 북한을 콕 집어 강하게 비판하는 게 낫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