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cm ‘일본도’와 8번째 ‘신고’…살인범 첫 마디는 “미안하지 않다”
피의자 “나라 팔아먹은 김건희” “中 스파이 처단” 궤변 도검 관리 구멍…일본도 소지-7차례 112 신고 연결 못해 경찰, 도검 소유자 전수조사 및 소지 허가·갱신 절차 강화
“피해자에게 미안한 마음 없다. 심신미약이 아닌 멀쩡한 정신으로 했다.”
날 길이가 75cm에 달하는 일본도를 휘둘러 같은 아파트에 살던 40대 남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백아무개씨(37)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 앞에 선 피의자는 고개를 들고 단호한 목소리로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황망하게 생을 마감한 피해자와 가족을 잃은 유족에 대한 죄책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상하고도 기이한 행동을 이어가던 30대 남성이 살상 무기인 도검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경찰청 ‘기록’에만 존재했을 뿐 8번째 신고 전까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검이 언제든 강력범죄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규제와 관리 제도를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상행동’ 수차례 신고…결국 참변으로
7월29일 밤 11시30분께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 앞에서 살인 피의자 백씨와 피해자 김아무개씨(43)가 마주쳤다. 김씨는 잠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선 참이었다. 이웃 주민인 김씨에게 다가간 백씨는 돌연 자신이 들고 있던 칼을 꺼내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백씨는 인도에서부터 정문, 주차장 입구까지 김씨의 뒤를 쫓으며 공격했다. 김씨는 다량의 피를 흘리며 저항할 틈도 없이 쓰러졌다. 사력을 다해 휴대전화로 112를 눌렀지만,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한 채 병원 이송 도중 끝내 숨을 거뒀다. 부검 결과 김씨의 사인은 ‘전신 다발성 자절창’으로 확인됐다. 온몸에서 자상(찔린 상처)과 절상(베인 상처)이 확인됐다는 의미다.
백씨는 범행 직후 자신의 집으로 달아났다가 1시간 후 긴급 체포됐다. 백씨가 대체 무슨 이유로 이토록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경찰은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해당 아파트 주민들에 따르면, 백씨는 대기업에 다니다 올해 1월 퇴사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잦은 이상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칼놀이를 하자”고 하거나, 반복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헬스장에서 주민들과 마찰을 일으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백씨 스스로 112에 신고했던 3건을 포함해 최근 1년간 총 7건이 그와 연루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그때마다 단순 소란 정도로 다뤄졌을 뿐 후속 조치로 나아가진 않았다.
범행 나흘 만인 8월1일 오전 구속영장 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에 나온 백씨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쏟아지는 질문에 모두 답했다. ‘피해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느냐’는 질문에 백씨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없다”고 잘라 말했다.
피해자가 미행한다고 생각해 범행했는지를 묻자 “네”라고 답했고, 마약 검사를 거부한 이유에 대해서는 “비밀 스파이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평소에도 도검을 소지하고 다녔는지, 전 직장 상사와 불화가 있었는지 묻는 질문에는 “아니다”고 부인했다. 영장심사를 마치고 나온 백씨는 범행 당일 일본도를 갖고 나온 이유에 대해 “나라를 팔아먹은 김건희와 중국 스파이를 처단하기 위해서”라며 이들이 중국과 함께 한반도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이어갔다. 또 “나는 심신미약이 아니다. 멀쩡한 정신으로 (범행)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법원은 백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백씨와 그 가족을 상대로 범행 동기를 밝히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는 한편 진료기록 및 각종 검사를 통해 마약 투약·정신병력 여부를 확인할 방침이다.
살상 무기가 ‘장식용’? 구멍 뚫린 법망
초등학교 3학년생과 4세 아들을 둔 아버지가 일본도에 찔리고 베여 처참히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경찰에도 비상이 걸렸다. 백씨는 재직 중이던 회사를 퇴사한 올해 1월 일본도를 구매했고, 보관 목적을 ‘장식용’으로 기재해 소지 허가를 받았다.
문제는 이번 사건처럼 살상 무기로 쓰일 수 있는 도검 관리에 큰 구멍이 뚫렸다는 점이다. 총포·도검·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직무상, 또는 제조업자·판매업자 등이 총포와 도검 등을 소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이를 보유할 수 있다. 심신상실자나 마약·대마·향정신성의약품·알코올 중독자, 정신질환자, 뇌전증 환자 등은 총포나 도검, 석궁 등의 소지 허가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총포와 달리 도검은 허가부터 갱신까지 엄격한 기준을 적용받지 않는다. 총포의 경우 소지 희망자의 정신질환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신체검사서를 제출해야 하지만 도검이나 가스발사총 등은 운전면허로 대체할 수 있다. 또 총포는 3년마다 소지 허가를 갱신해야 하는데, 도검은 별다른 갱신 규정조차 없는 실정이다. 도검 소지 허가를 받은 이후 정신질환이 생기거나 마약·알코올에 중독되더라도 당국이 이를 걸러낼 수 없다는 뜻이다.
만일 백씨와 관련한 112 신고가 7차례 있었고, 그가 일본도 소지 허가를 받은 인물이라는 점을 수사기관이 빨리 인지했다면 극단적인 범행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당국으로부터 소지 허가를 받은 일본도로 가족 또는 이웃을 살해하는 비극이 반복되면서 관련 규정을 손질해야 한다는 비판도 한층 거세진다. 이에 경찰도 부랴부랴 전수점검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경찰청은 8월1일부터 한 달간 전체 소지 허가 도검 8만2641점에 대한 전수점검을 실시한다. 소지인의 범죄경력 여부와 가정폭력 이력, 관할 경찰서 의견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소지 허가의 적정성을 면밀히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정신건강 자료를 제출받고, 허가 관청이 지정하는 장소에 도검을 보관토록 할 방침이다.
신규 소지 허가 절차도 강화해 직접 면담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도검 관리를 엄격히 할 수 있도록 총포화약법 개정도 추진한다. 경찰 관계자는 “도검 전수점검을 통해 국민 불안감을 빠르게 해소하고 총포화약법 개정을 통해 현행 법령상 미비 사항을 보완해 안전관리 사각지대를 신속히 제거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