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세 개의 화살’ 통했나…日 증시, 연일 최고치 [최준영의 경제 바로읽기]
엔화 약세→기업 수익성 증가→임금 인상→불황 탈출? 실질GDP는 뒷걸음질…역대급 엔저가 경제 도약 발목
최근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증가하고 있다. 역대급 엔화 약세에 따라 만만해진 현지 물가와 더불어 과거의 향수가 강하게 남아있는 일본 특유의 분위기를 선호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일본을 방문한 관광객은 2507만 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한국 관광객은 696만 명으로, 전체 해외 관광객의 27.8%를 차지했다. 대만(420만 명), 중국(243만 명)을 제치고 압도적인 1위다. 실제로 일본을 방문해 보면 주요 대도시들은 늘어나는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으며 활기가 느껴지고 있다. 체감상 과거의 침체됐던 모습에서 확실히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약세로 전환한 엔화…증시로 밀려드는 자금
일본의 부활은 주식시장에서도 확연히 느껴지고 있다. 일본 증시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지수는 7월11일 장 중 4만2426을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일본에 대한 해외 기업들의 투자가 증가하고 반도체 분야의 투자가 늘어나면서 관련 기업들의 주가 상승이 지수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에 더해 중동 지역의 해외 투자금 증가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 주식시장 상승의 가장 큰 요인으로는 엔저의 지속을 들 수 있다. 일본은 오랫동안 과도하게 높은 엔화 가치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이 커질 때마다 엔화가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면서 강세를 이어갔는데, 이는 일본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 저하를 초래했고, 디플레이션을 유발하면서 경기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에 2012년 12월 재집권에 성공한 아베 신조 총리는 △대규모 금융완화 △적극적 재정정책 △과감한 성장 전략 등 ‘세 개의 화살’을 축으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추진했다. 이 가운데 본원통화를 2년간 2배로 늘리는 양적완화 정책이 대표적이었다. 디플레이션을 탈출해 연간 물가가 2% 상승하는 인플레이션 상황에 도달할 때까지 무제한적으로 통화량을 늘려 나가겠다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통화공급 확대를 위해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국채 매입과 더불어 자국 증시에 상장된 상장지수펀드(ETF)와 개별 주식까지 직접 매입했다. 중앙은행이 직접 주식을 매입하는 행위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파격적 방안이었다. 10년 넘게 진행된 유동성 무제한 공급과 2022년 말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금리 인상에 따라 2023년부터 엔화는 드디어 약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엔화 약세는 일본 대기업의 수익성 증가로 이어졌다. 도쿄증권거래소 프리미엄시장에 상장된 170개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이들 업체의 2023년 회계연도 총이익은 14조8000억 엔(약 130조2400억원)을 기록하면서 전년 대비 23% 증가했다. 토요타 자동차의 경우 2023년 회계연도 순이익이 4조9449억 엔(약 43조5000억원)에 이르렀다. 수익 증가뿐만 아니라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도 6.7%에 달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생산 및 판매 증가가 기본이지만 여기에 더해 가격 인상이 시장에서 받아들여지고, 엔저에 따른 환차익 등이 겹치면서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기업의 실적 개선은 임금 인상으로 이어졌다. 봄철에 진행되는 임금단체협상을 의미하는 순토(春鬪) 기간 중에 5.28%의 임금 인상안에 합의가 이뤄졌다. 이는 33년 만에 가장 높은 폭의 임금 인상이었다. 무제한적인 유동성 공급에 따른 디플레이션 탈출과 엔고 탈출, 그리고 이어지는 기업 실적 개선과 임금 상승은 다시 연간 2% 수준의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일본이 지난 30년간의 불황에서 드디어 탈출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게 됐다는 견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지표로 드러나는 모습은 체감과 다르다. 7월1일 일본 정부는 이례적으로 실질국내총생산(GDP) 수정치를 발표했다. 이에 올 1분기 실질GDP는 연간 기준 당초 추정치 1.8% 감소에서 2.9% 감소로 재공표됐다. 2023년 4분기 실질GDP도 당초 0.4% 성장에서 0.1% 성장으로 하향 조정됐다. 뜨거워 보이는 외양과 달리 실제 경기 활성화 효과는 매우 제한된 분야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률이 올라갈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근거는 기업의 물가상승률 전망이다. 기업들이 예상하는 인플레이션 기대치는 여전히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3년 후 물가상승률이 2.3%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5년 후에도 2.2%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했다. 물가 상승이 예상되면 기업들은 관련 투자를 확대한다. 실제로 대기업들은 2023 회계연도에 자본지출을 10.6% 확대한 데 이어 2025년 3월에 끝나는 2024 회계연도에도 자본지출을 11.1% 늘릴 계획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장 지표와 기업 및 정부의 예상 가운데 무엇이 더 현실을 반영하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호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행은 규모와 관계없이 모든 기업 부문에서 임금 인상이 확산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단기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무제한적인 유동성 공급을 점차 축소하면서 제로 금리에서 탈출해 정상적인 금리로의 복귀를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구매력도 계속 감소…엔저의 역습인가
문제는 일본의 구매력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 5월 일본의 가계지출은 전년 대비 1.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대했던 0.1% 성장과는 크게 동떨어진 결과다. 일본은행이 추진하는 금리 인상을 위해서는 소비가 견조하게 이어지면서 인플레이션이 2%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데 상황이 그렇지 못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임금이 크게 상승하고 일본 정부가 추진 중인 세금 감면이 적용되면 몇 달 안에 가계소비가 회복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는 하다. 역대급 엔저에 따라 수입물가는 상승하지만 경기 회복 속도 및 임금 상승이 이에 미치지 못하면서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의 혼란스러운 경제지표들은 한번 장기 침체에 빠진 경제를 다시 정상궤도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부작용을 감내하고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정작 그사이에 국가 차원의 경제 체력이 약화되면서, 힘겹게 만들어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상황이 최근 일본 경제의 모습인 것이다. 30년의 불황을 거치면서도 해외에 투자해둔 금융자산이 가져오는 자본수지 흑자를 통해 국가경제를 유지해 왔던 일본이지만 역대급 엔저는 이러한 기조마저 위협하고 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다음 단계로의 이동과 도약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다시 한번 긴 추락을 경험할지는 향후 2~3년 안에 결정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