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짓고 해외로 도피한 회장님들…안 잡나 못 잡나
이인광·허재호·김종훈·선종구 회장을 쫓는 검찰의 고민
# 2019년 4월14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태도 동서쪽 1.5km 해상을 지나던 바지선에 해경이 들이닥쳤다. 해경은 이날 기관실 환기구 옆 천장에 몸을 숨긴 한아무개 회장을 검거했다. 여러 상장사를 지배하던 그는 수백억원대 횡령 혐의로 구속 전 피의자 심사를 앞둔 상태였다. 한 회장은 구속을 피하기 위해 밀항 브로커에게 5000만원을 건네고 경남 거제시 고현항에서 산둥성 룽청시로 향하는 선박에 몸을 실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 회장은 해외 도피 성공을 목전에 뒀다. 그러나 한순간의 방심이 실패로 이어졌다. 그가 탑승한 선박이 국내 해역을 이탈하기 직전에 검찰 수배를 피하기 위해 꺼놨던 핸드폰을 켜서 지인들에게 한국을 떠난다는 취지의 전화를 한 것이 자충수였다. 한 회장의 위치를 파악한 해경은 즉각 신병 확보에 나섰다. 그 결과 한 회장은 결국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져 2020년 9월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았다.
# 해외 도피에 성공했지만 결국 검거된 회장도 있다. 1조6000억원대 환매 중단으로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라임 사태’의 몸통으로 지목되는 이인광 에스모 회장이 그 장본인이다. 라임자산운용 자금 2500억원으로 복수의 상장사를 인수한 그는 2019년 횡령과 주가조작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보유 중이던 상장사 지분을 담보로 수백억원대 대출을 받아 출국한 후 종적을 감췄다.
브로커에 5000만원 건네고 바지선 승선
검찰은 지난 3월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와 공조해 프랑스 니스에서 이 회장을 검거했다. 그가 해외 도피길에 오른 지 4년6개월여 만이었다. 지난해 말부터 라임 사태에 대한 재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이 회장 내연녀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에서 이 회장의 은신처를 특정했다. 내연녀가 이 회장에게 김치 등 식료품을 국제특송으로 발송한 영수증이 단서가 됐다. 이 회장은 현재 국내 송환을 앞둔 상황이다.
해외 도피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회장의 사례처럼 밀항에 실패하거나, 도피에 성공하더라도 이 회장처럼 검거돼 국내로 송환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제사범들에게 해외 도피는 여전히 매력적인 선택지다. 그동안 쌓아온 재력 내지는 범죄수익을 바탕으로 해외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도 해외에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회장이 적지 않다.
‘황제노역’이란 말을 탄생시킨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광주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허 전 회장의 업무상 횡령 혐의를 수사 중이다. 그러나 수사는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허 전 회장이 뉴질랜드에 체류하고 있어서다. 허 전 회장은 또 2019년 차명 보유한 대한화재해상보험 주식 매도 과정에서 양도소득세를 탈루한 혐의 등으로도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허 전 회장은 해외 체류를 이유로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공판에 출석하지 않고 있다.
그의 도피 생활은 2010년부터 시작됐다. 횡령과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된 허 전 회장은 그해 항소심에서 선고받은 벌금 254억원을 납부하지 않고 뉴질랜드로 출국했다. 검찰의 압박에 2014년 귀국했지만, 허 전 회장이 노역으로 하루에 벌금 5억원을 탕감 받는다는 점이 알려지며 ‘황제노역’ 논란이 불거졌다. 이 때문에 검찰은 노역형을 중지하고 벌금 납부로 전환했다. 허 전 회장은 벌금을 완납한 직후 뉴질랜드로 돌아가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다.
주가조작 혐의를 받는 구본현 전 엑사이엔씨 대표도 현재 해외 도피 중이다. 그는 상장사인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파티게임즈와 모다를 인수한 후 허위 공시 등을 통해 주가를 조작해 수백억원대 부당이득을 편취한 혐의를 받는다. 구 전 대표는 수사 시작 직전인 2018년 10월 네덜란드로 출국한 후 잠적했다. 경찰은 구 전 대표의 여권을 취소하고 인터폴 적색수배를 내린 상태다.
선종구 전 하이마트 회장도 구속을 피해 출국하면서 적색수배가 내려진 상태다. 그는 하이마트 인수합병(M&A) 과정에서 사익을 위해 회사에 2400억원대 손해를 입힌 혐의로 2012년 기소됐다. 1·2심 재판부는 선 전 회장의 일부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파기환송을 결정하면서 구속 가능성이 커지자 선 전 회장은 미국으로 떠났다. 결국 그에게는 징역 5년형이 확정됐지만, 현재 소재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해외로 도피한 회장 중 일부는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하는 모습이 공개돼 공분을 사기도 했다. 실제, 허재호 전 회장은 뉴질랜드의 고급 카지노 VIP실에서 도박을 하거나 요트, 낚시, 골프를 즐기는 모습이 수차례 포착됐다. 이 때문에 ‘황제 도피’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그는 현재도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최고급 아파트에 거주하며 호화생활을 이어가는 것으로 전해진다.
횡령과 불법 대북 송금 혐의에 대한 수사 직전인 2022년 5월 싱가포르로 도피한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도 지난해 1월 태국에서 검거되기 전까지 호화생활을 했다. 필리핀 마닐라 카지노에서 억대 도박을 벌이는가 하면, 한국에서 한식과 회를 공수해 파티도 열었다.
대책은 여권 무효화와 적색수배뿐
수사 당국 관계자들은 해외 도피 회장들의 신병 확보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소재 파악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수사 당국이 해외로 도피한 수배자 신병 확보를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여권 무효화와 인터폴 적색수배 요청이 전부다. 해외 도피처에 은신하면서 비행기나 배로 이동하지 않는 경우 이마저도 실효를 기대하기 어렵다.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은 국가에 숨어든 경우는 소재 파악에 성공하더라도 국내 송환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수백억원대 횡령 혐의와 관련한 수사를 피해 1998년 밀항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4남 정한근씨가 그런 경우다. 검찰은 도피 20여 년 만에 정씨의 에콰도르 거주 사실을 확인하고 범죄인 인도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에콰도르와는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검찰은 에콰도르 내무부에 정씨의 강제 추방을 요청하는 우회 수단을 동원해 2019년 정씨의 신병을 확보했다.
수배자가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된 국가에 체류 중임을 확인했음에도 국내 송환을 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범죄인 인도 청구 대상 범죄는 원칙적으로 청구국과 피청구국의 공통 처벌 대상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사 당국은 치과 프랜차이즈를 불법 운영하다 수사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한 김종훈 유디치과그룹 회장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건강보험 재정을 위해 의료인 한 명이 한 개의 의료기관만 개설·운영해야 한다는 ‘1인1개소법’에 따라 프랜차이즈 병원이 불법이다. 그러나 보험체계가 다른 미국에서 프랜차이즈 병원은 처벌 대상이 아니다. 이 때문에 수사 당국은 미국에 범죄인 인도 청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김 회장은 현재 미국 전역에 대형 프랜차이즈형 치과병원인 ‘유드림 치과’를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쌓고 있다.
김봉현·김찬경의 밀항은 사전 차단돼
해외 도피 최악의 사례는 단연 밀항이다. 처벌을 면할 목적으로 해외로 도피하면 형사법에 따라 공소시효가 정지된다. 그러나 출국기록을 남기지 않고 밀항한 경우는 국내 체류로 간주돼 공소시효 정지 제도를 적용할 수 없다. 공소시효 동안 해외에 체류하다 입국 기록을 남기지 않고 귀국하면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수사 당국이 밀항 원천 차단에 주력하는 이유다.
실제, 검찰은 이인광 회장과 함께 ‘라임 회장단’ 중 한 명이던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이 2022년 11월 보석 중 전자팔찌를 끊고 도주해 해외 도피를 준비할 당시 해상 경계를 강화해 밀항을 사전에 차단했다. 그 결과 김 전 회장은 밀항을 포기하고 국내 은신처에 머무르다 체포됐다. 앞서 수사 당국은 2012년에도 횡령 혐의로 수사를 받던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밀항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를 현장 체포하기도 했다.
수사 당국은 여전히 밀항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밀항 브로커들이 단속을 피해 점조직 형태로 움직이는 데다, 밀항의 단계별 담당자가 모두 달라 밀항 조직을 단속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수배자 주변인들이 제공하는 첩보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