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에 침투한 ‘Y2K’의 이유 있는 열풍
팝 레트로를 넘어선 K팝 레트로
트와이스 멤버 나연의 솔로곡 《ABCD》는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을 준다. 30대 이상의 음악 팬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음악과 뮤직비디오는 2000년대 전후에 유행했던 유명 팝 디바들을 향한 오마주임을 분명히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특징들을 모아놓은 앤솔로지(anthology) 같은 작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누구라고만은 말할 수 없지만 비욘세, 샤키라,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이효리 그리고 보아의 느낌이 이리저리 뒤섞여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간다. 레트로한 착장과 파워풀한 몸동작, 섹시함이 넘치는 이미지는 영락없이 뜨거웠던 2000년대 초반의 흔적들이다. 20년 전의 유행을 가져오고 있지만 촌스럽거나 진부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많은 레퍼런스를 차용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오리지널하게 느껴진다.
가장 트와이스다운 멤버 중 하나인 나연의 솔로곡이지만 이미 트와이스의 굴레는 벗어던진, Y2K 디바의 모습만이 비춰질 뿐이다. 나연의 솔로 활동 이후 가장 매력적인 곡일뿐만 아니라 이제껏 K팝에서 시도된 Y2K 스타일 곡들 중에서 가장 캐치한 매력을 자랑하는 곡이기도 하다.
Y2K, 밀레니얼…2000년대의 재소환
Y2K라는 말은 원래 Y2K 문제(Y2K problem)라고 해서, 세기말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일어나는 여러 문제, 특히 컴퓨터 관련 버그를 의미했다. Y2K라는 이름의 아이돌 밴드가 인기를 얻었을 정도로 한 시대를 규정했던 유행어였으나 긴박했던 인류의 우려와는 달리 실제로 별다른 사고가 벌어지지 않음으로써 많은 이의 기억 속에서 빠른 속도로 잊혀갔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Y2K라는 말이 완전히 새로운 맥락에서 활발하게 소환되고 있다. 물론 지금 Y2K는 더 이상 컴퓨터 관련 버그가 아닌 미학 용어를 지칭할 때만 사용된다. 흔히 ‘밀레니얼’ 스타일이라고도 말하는, 90년대 말에 시작돼 2010년대 이전까지 유행했던 음악, 패션 등 미학적 특성이 부활해 새롭게 유행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퓨처리스틱 Y2K, 맥블링(McBling), 프루티거 에어로(frutiger aero) 등의 개념 역시 넓은 의미에서 이 같은 Y2K의 여러 갈래라고 할 수 있다.
꼭 이런 전문적인 미학 용어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대중문화에는 오래전부터 20년 혹은 30년 주기설과 같은 이론 아닌 이론들이 있어왔다. 그러니까 20~30년 전의 유행이 ‘레트로’ 혹은 ‘뉴트로’ 라는 이름의 복고 열풍으로 새롭게 돌아온다는 것인데, 이제 그 차례가 90년대 말, 2000년대 초의 문화라는 것이다.
2000년대 초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이제 30·40대로 접어들어 그 시절을 돌아볼 기회를 얻게 되고, 또 그 시대의 문화를 새로운 것으로 느끼는 젠지(Gen-Z)들이 소환하는 ‘뉴트로’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니 제법 설득력이 있다. 10년 전부터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X세대 스타일의 화장이나 옷차림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아무튼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2000년대 초반의 문화들이 적극적으로 소환되고 있고, 그것들이 가장 핫하고 트렌디한 아티스트들에 의해 활용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뉴진스가 주도하고, 키오프가 이어받은 Y2K 열풍
K팝 신에서 이 흐름을 가장 먼저 주도한 것은 다름 아닌 뉴진스였다. K팝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데뷔 중 하나로 기억되는 《Attention》 은 K팝 신에서 아득히 잊힌 2000년대 전후 K팝의 '올드스쿨' 시절을 세련되면서도 친숙한 방식으로 현대화한 Y2K K팝의 걸작이었다. 사실 뉴진스는 Y2K뿐 아니라 1990~2000년 시대의 레트로를 팀의 미학적 정체성으로 삼아온 팀이기도 하다.
최근 발표한 신곡 《Bubble Gum》이나 《How Sweet》은 물론 최근 공개된 일본어 싱글 《Supernatural》만 들어봐도 이 의도는 분명히 읽힌다. 한동안 K팝에서는 소극적인 방식으로만 레퍼런싱됐던 90년대 장르인 마이애미 베이스와 뉴잭스윙이 음악, 패션, 이미지에서 현대적으로 변용됐음을 알 수 있다.
원래 게임체인저가 등장하고 나면 신은 급격하게 그 흐름에 올라타는 법이다. 이전까지 기획사별로, 프로듀서의 취향에 따라 분명한 차이를 보였던 K팝 신은 뉴진스가 유행시킨 Y2K의 미학을 맹렬한 기세로 함께 탐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 가운데 작년에 데뷔한 신인 걸그룹 키스오브라이프(Kiss of Life)는 현대적인 감성의 Y2K K팝의 핵심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팀이다. 아이돌 출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해인이 기획한 것으로도 유명한 이 그룹은 음악과 패션 그리고 무대 모두에서 Y2K 미학의 특징을 적극 활용해 성공을 거뒀다.
작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중 멤버 나띠의 솔로곡 《Sugarcoat》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 2000년대 초반 R&B를 표방한 곡으로 K팝 팬들 사이에서 이미 숨은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나띠의 의상과 안무 그리고 영상미 등은 이효리, 박봄 등이 출연했던 2000년대 초반의 한 핸드폰 광고영상을 연상시키며 복고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이라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올해 발표한 신곡 《Midas Touch》 역시 의심할 바 없는 Y2K 레트로인데, 이번에는 아예 대중에게 훨씬 더 친숙한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이효리의 사운드와 스타일을 오마주하며 그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음악계에서 Y2K의 유행이 그 이전에 있었던 다른 시대의 레트로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2000년대 초반의 레트로는 팝과 가요를 동시에 보편적으로 소환해도 어색하지 않고 충분히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점이다. 팝과 가요가 완전히 다른 두 시장이었던 7080 혹은 X세대 레트로가 보다 가요적 취향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면, Y2K는 해외의 유행과 국내의 유행 간에 시차가 많이 느껴지지 않는 동시대적인 유행을 소환하는 성격이 짙게 느껴진다.
나연의 《ABCD》가 정확히 그 지점을 보여준다. 짧은 한 곡을 통해 나연은 비욘세가 됐다가 이효리가 되었다가 다시 보아가 되기도 한다. 물론 결론은 다시 K팝 디바인 나연으로 맺어진다.
그것은 사실 팝도 아니고 가요도 아닌, 동시대적인 어떤 유행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의 비욘세나 브리트니는 이효리에게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지만 트와이스는 이미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나연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해외 팬들은 브리트니와 아길레라로 대표되는 그들만의 Y2K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 그 주체는 팝이 아니라 K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