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 9개월간 매주 1명씩 사망…‘정치 살인’ 판치는 멕시코의 비극
당선 도우며 선거에 투자하는 ‘카르텔’…지방정부 장악 후 ‘범죄도시화’
인구가 1억3000만 명으로 중남미 최대의 스페인어 사용 국가인 멕시코가 200년 헌정 사상 최대 정치 드라마를 연출했다. 6월2일 치른 대선·총선·지방선거에서 첫 여성 대통령 당선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집권 좌파 국가재생운동(모레나)의 클라우디아 샤인바움 후보가 59.76%를 득표해 27.45%를 얻은 우파 야당연합의 소치틀 갈베스 후보를 눌렀다. 갈베스 후보도 여성이라 누가 이겨도 여성 대통령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는 전통적으로 남성우월주의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만연한 마치스모(마초이즘)의 나라라는 일부 평가가 있어 이번 대선으로 새로운 젠더 평등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6월3일 멕시코 중서부 미초아칸주에 있는 인구 1만5000명의 소도시 코티하에서 욜란다 산체스 시장이 경호원과 함께 괴한의 총격으로 숨졌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2021년 이 도시의 첫 여성 시장이 된 산체스는 갱단 폭력에 강경 대응을 강조해 왔다. AP통신은 멕시코에선 이번 선거 기간 중 투표장에 괴한이 들어와 유권자를 납치하고, 모터사이클을 탄 남자들이 후보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 선거 폭력이 난무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처럼 무자비한 정치 폭력도 이번 선거의 주요 쟁점의 하나였다고 전했다.
총격·납치 등 폭력으로 얼룩진 멕시코 선거
멕시코는 2000년 71년 만의 정권 교체 이후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 때문에 이러한 정치 폭력, 특히 여성 정치인 피살은 다른 나라에서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1929~2000년 71년 이상 중도 포퓰리즘 정당인 제도혁명당이 집권했던 멕시코는 2000년 보수정당인 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정치 혁신을 시작했다.
국민행동당은 2006~12년 펠리페 칼데론까지 12년을 내리 집권했으며 제도혁명당은 2012년 엔리케 페냐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2018년 진보정당인 국가재생운동의 안드레스 오브라도르가 대통령에 오르면서 처음으로 우파에서 좌파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이번 선거에선 국가재생운동이 대선·총선·지방선거에서 대승했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안정과 대조적으로 전국을 장악한 수많은 마약 연계 조직폭력단(카르텔)의 폭력은 갈수록 빈도와 정도가 심해져 왔다는 점이다. 미국의 글로벌 인터넷 미디어인 GZERO에 따르면 폭스 대통령 시절 연간 58건이던 정치 살인이 칼데론 시절 176건, 페냐 집권기에 483명으로 급격히 늘어났으며, 올 10월 6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오브라도르 집권기에는 지금까지 벌써 500명을 넘어섰다.
카르텔의 총구는 인권운동가·현역정치인·환경운동가·선거후보·언론인 등 다섯 직종에 몰린다. 페냐 집권기 희생자를 보면 인권운동가가 142명으로 가장 많고, 현역정치인 137명, 환경운동가 103명, 선거후보 62명, 언론인 57명 순이다.
정치 살인은 주로 선거 기간에 집중된다. 대선과 하원의원·자치단체장을 함께 뽑은 6월2일 투표를 앞두고 선거운동이 펼쳐진 9개월 동안 매주 한 명꼴인 34명의 후보가 목숨을 잃었다. 피살자의 3분의 1이 집권당 소속이다.
미국 싱크탱크인 윌슨센터는 멕시코 정치 폭력의 배경을 “복합적이고 다양하다”고 설명한다. 마약 이권을 둘러싼 카르텔 간 경쟁과 알력, 조직 피해에 대한 제압 성격의 벤데타(피의 보복), 그리고 지하경제와 지방권력 간 검은 연계망 등 다양한 원인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
눈여겨볼 점은 멕시코 정부가 2006년 마약과의 전쟁에 나선 이래 정부와 카르텔의 ‘갑과 을’ 관계가 서서히 역전돼 왔다는 사실이다. 멕시코 정부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마약 카르텔 단속에 나선 초기에는 군과 경찰을 앞세운 공권력이 카르텔을 압도했다. 수세에 몰린 카르텔은 납치·참수·강간·방화 등 잔혹 행위로 주민과 공권력을 겁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등 주요 마약 수요처의 시장이 변화하면서 카르텔은 궁지에 몰렸다. 우선 기술 발달로 컴퓨터 해킹, 통신 감청, 드론 감시가 강화되면서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가는 마약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다.
여기에 미국에서 멕시코산 마약의 수요가 급감했다. 미국 여러 주에서 마리화나가 합법화하고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 사용이 늘면서 카르텔이 주로 공급해온 헤로인 수요가 급감했다. 현재 미국 50개 주 중 38개 주에서 마리화나의 의학적 사용이 합법화됐고, 24개 주에서는 리크리에이션용 사용도 용인된다.
현재 미국에선 펜타닐이 콜롬비아산 코카인이나 멕시코산 헤로인을 누르고 최대 마약 시장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 보건통계국(NCHS)에 따르면 2022년 미국에서 보고된 10만7941건의 마약 과용 사망 중 합성 오피오이드(주로 펜타닐)에 의한 것이 가장 많았다. 펜타닐에 의한 사망자는 2017년에서 2022년 사이 7.5배 늘어났다. 카르텔이 더 이상 미국에 마약만 밀수출해서는 버티기 어렵게 된 셈이다.
그러자 카르텔은 돈벌이 수단을 마약에서 석유 절도, 강탈·강요, 납치·유괴 등 지역 기반의 다양한 범죄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를 위해선 지역의 경찰과 행정기관의 협력이나 눈감아주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멕시코 전역의 카르텔과 크고 작은 갱단이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인물이 지역 또는 중앙정부의 선출직 공무원으로 뽑힐 수 있도록 후보 살해, 선거 방해 등 조직적인 정치 공작에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처음엔 급료가 부족한 경찰이나 행정 공무원에게 뇌물을 찔러주며 조직범죄에 대한 묵인·방조 정도나 기대하던 범죄단체들도 갈수록 대담해졌다. 일부 지역에선 정부기관이 물리력으로 경쟁 조직을 압박하거나 정보를 제공해 주면서 검은 사업을 비호하거나 ‘동업’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경찰·공무원도 카르텔의 ‘검은 사업’ 동업자
일부 카르텔은 선거 지원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지방정부와 비밀협약을 맺고 일부 지역을 공권력이 개입하지 못하는 해방구인 ‘지역 천국’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범죄조직이 뇌물 제공 수준을 넘어 선거 개입까지 하면서 일부 지방정부를 아예 장악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윌슨센터는 이를 두고 “갱단이 정치인들에게 선거 과정에서의 ‘투자’에 대한 ‘채권 회수’를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멕시코의 범죄단체들이 정치인과 지방행정기관에 대한 불법적 개입과 ‘지하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이미 도도한 검은 물결이 됐다. 윌슨센터에 따르면 조직범죄단은 정치적 폭력을 통해 선거에 영향을 끼쳐 비교적 유화적이거나 협력 관계에 있는 정치인의 당선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정치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들과 기존 지방권력 간 협력 카르텔을 위협할 것으로 보이는 후보를 살해하고, 투표·개표 종사자를 협박하는 것은 물론 투표장을 공격하거나 강도나 절도를 벌이기도 한다. 멕시코의 선거가 피로 얼룩지는 이유이자 정치인·사회운동가·언론인이 표적이 되는 배경이다. 여기에 마치스모까지 겹쳐 여성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여성 시장이 대놓고 살해되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멕시코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