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회담의 정치학, ‘끌려가는’ 협치 ‘주도하는’ 협치 [최병천의 인사이트]
영수회담, 포스트 4·10 체제의 첫 시험대…“협상 테이블에 ‘尹 어젠다’가 없다”
4·10 총선이 끝났다. 선거 결과는 민주당 175석, 국민의힘 108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이 됐다. 4·10 총선은 민주당 압승, 국민의힘 참패, 조국혁신당 돌풍, 개혁신당 선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총선 다음 날인 4월11일 대통령실 이관섭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사과를 전하는 ‘대독(代讀) 사과’를 했다. 4월16일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국무회의 발언을 오전에 생중계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과는 없었다. 오후에 ‘대통령실 관계자’의 발언으로 대통령이 ‘비공식 사과’를 했다고 발표했다. 대독 사과와 비공식 사과라니. 윤 대통령이 ‘총선 참패’ 사실은 인지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적절한 대응이었다.
4월19일 금요일,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대통령 국정 운영에 대한 긍정평가는 23%가 나왔다. 2주 전에 비해 11%포인트 추락했는데, 23% 지지율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최저 수준이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의 역대 최저 지지율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윤 대통령 국정 운영 지지율이 ‘최저’를 찍은 바로 그날, 윤 대통령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뒤늦었지만, 다행이었다.
영수회담의 의제 등을 협의하기 위한 1차 실무회동이 4월23일, 2차 실무회동이 4월25일 열렸다. 영수회담은 윤 대통령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 영수회담은 ‘협치’의 물꼬를 틀 수 있을까?
지지율 ‘최저’ 찍은 날 尹 영수회담 제안
[표]는 역대 정부의 영수회담 역사를 보여준다. 한국 정치사에서 영수회담은 총 25회 있었다. 영수회담의 첫 시작은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야당 대표였던 박순천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을 만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임기 중에 5번의 영수회담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5년 임기 중에 8번의 영수회담을 했다. 야당 대표를 가장 많이 만난 대통령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야당 대표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경우다.
흥미로운 것은 영수회담의 유형을 구분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영수회담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대통령 어젠다(의제)에 대한 야당의 협조 요청 ②대통령이 야권의 어젠다를 수용하는 경우 ③정치적 국면 전환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대통령 어젠다에 대한 야당의 협조를 요청한 경우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협정 비준에 대한 야당의 협조를 요청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김대중 총재를 만나 남북대화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경우도 같은 맥락이다. 이후 노태우 정부는 ‘남북합의서’를 만들어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이회창 총재를 만나 의약분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경우도 같다. 당시 야당이었던 신한국당은 의약분업을 6개월 이후 실시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과의 담판 이후 즉각 실시에 동의했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이 주장하던 약사법 개정을 수용했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정책의 주고받기’를 했던 경우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홍준표 대표를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경우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당시 홍준표 대표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두 번째 유형은, 야권의 어젠다를 대통령이 수용하기 위한 영수회담이다. 이 경우는 대부분 ‘야당 우위’의 정치지형이었다.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만난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국면이었다. 유신 체제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부활시키는 개헌 및 긴급조치 관련자의 사면복권 수용을 논의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은 김영삼 총재를 만났다. 당시에는 직선제 개헌 요구로 6월 항쟁의 불길이 타오르던 시점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김영삼 총재의 요구를 거절했다. 직선제 개헌 문제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게 전권을 위임했다고 발표했다. 며칠 후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직선제 개헌 수용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노태우 대표를 정치적으로 ‘띄워주기 위한’ 용도의 영수회담이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손학규 대표를 만난다. 광우병 촛불시위 국면을 수습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세 번째 유형은, 정치적 국면 전환용이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만난다. 박근혜 대표에게 대연정을 제안했고, 박근혜 대표는 즉석에서 거절 의사를 표명한다. 당시 영수회담은 별 성과 없이 끝났다.
한국 정치사에 있었던 역대 정부의 영수회담 역사를 살펴보면, ‘대통령이 주도하는’ 영수회담과 ‘대통령이 끌려가는’ 영수회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1965년 영수회담, 노태우 대통령의 1988년 영수회담, 김대중 대통령의 2000년 영수회담, 문재인 대통령의 2018년 영수회담은 모두 ‘대통령이 주도하는’ 영수회담이었다.
반면 ‘대통령이 끌려가는’ 영수회담이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1980년 영수회담, 전두환 대통령의 1987년 영수회담, 이명박 대통령의 2008년 영수회담이 그랬다. 이 경우는 모두 ‘대통령이 끌려가는’ 영수회담이었다.
‘尹 정책 어젠다’ 없으니 ‘끌려가는 협치’ 강요받아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이제 정치를 하겠다’는 입장을 주변에 밝혔다고 한다. 흔히 윤석열 정부의 약점으로 ‘소통 부족’을 많이 지적한다. 소통 부족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이야기다. 집권여당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미션은 ‘국정 운영’을 잘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대통령의 정책 어젠다’가 분명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혼신의 힘을 다해 추진하고 있는 ‘정책 어젠다’는 무엇인가? 국민들은 이 지점이 부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영수회담을 위한 1~2차 실무회동에서는 대국민 사과, 채 상병 특검, 1인당 25만원 지급, 거부권 자제 등의 의제를 놓고 협상 중이다. 놀라운 일은 이 중에서 ‘대통령의 어젠다’는 없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야당의 관계에서 ‘협치’는 두 종류가 있다. 대통령이 ‘끌려가는’ 협치와 대통령이 ‘주도하는’ 협치다. 대통령의 정책 어젠다가 흐릿할수록 ‘끌려가는’ 협치를 강요받는다. 반대로 대통령의 정책 어젠다가 분명하면 ‘주도하는’ 협치를 할 수 있다. 핵심은 ‘대통령 정책 어젠다’의 선명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