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인생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이 우선적으로 갖는다” [배정원의 핫한 시대]
프랑스의 ‘여성 임신중지 자유’ 헌법 명기가 주는 메시지 여성의 성과 재생산권은 인권과 건강권 차원에서 고려돼야
3월4일, 프랑스에서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프랑스 의회가 ‘여성의 임신을 중지할 자유’를 명시한 헌법개정안을 찬성 780표, 반대 72표로 통과시킨 것이다. 이번 표결에는 전체 의원 925명 중 902명이 참석한 가운데 압도적 찬성으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번 개헌에 따라 프랑스 헌법 제34조에는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으로 정한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이는 세계 최초로 여성의 임신중지 자유를 명시한 헌법이라는 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번 개정헌법은 1975년 보건장관이던 시몬 베이유가 의회와 국민을 설득해 임신중지 합법화를 통과시킨 후, 여성이 ‘자신의 성과 재생산권에 대한 권리와 자유를 가져야 함’을 인정한 두 번째 승리라고 할 만하다.
임신중지 허용 판결 뒤집은 미국에 충격
특히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개정안 통과를 위해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는 의회에 직접 양당의 의견을 절충한 개정안을 제출하며 의회를 설득하고 표결에 이르게 하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개정헌법 날인식 후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임신중지는 영원한 권리가 될 것”이라며 “이 결정의 내용이 프랑스 헌법을 넘어 유럽 여러 기본권 헌장에도 명시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냈다. 또 그는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의 운명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어야 했다. 그들은 목숨을 잃었고,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자유를 위한 긴 투쟁이 오늘의 개헌을 가능하게 했다”고도 말했다. 그는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임신중지권과 여성인권이 쇠퇴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도록 임신중지 자유를 헌법에 명시해야 했다”고 강조했다.
사실 프랑스는 1975년부터 임신중지가 합법화되었기 때문에 이번 헌법 개정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헌법에 ‘여성의 임신중지 자유’를 명기한 것은 최근 미국과 폴란드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헌법 개정을 서둘렀고 도장을 찍듯이 명문화한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미국은 2022년 6월 그간 임신중지를 허용했던 근거인 ‘로 대 웨이드’ 법의 판결을 49년 만에 뒤집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시 미국 연방재판소 판사들을 보수 우위로 재편한 결과로 일어난 일이다.
이에 대해 많은 시민단체와 여성들이 반대시위를 했지만 이후 50개 주 가운데 최소 14개 주에서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임신중지를 금하는 주가 늘어나자 임신중지를 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위험에 빠졌고, 적지 않은 여성은 임신중지가 허용되는 주에서 시술을 받아야 했다. 위급환자조차 임신중지 금지법에 의해 의료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자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는 지난해 1월부터 일반 소매약국에서 임신중지약 판매를 허용함으로써 임신중지를 위한 접근성을 더 보장해 주었다.
이에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은 보수적인 텍사스주 연방지법원에 ‘미국 전역에서 미페프리스톤(경구용 낙태약)의 판매를 금해야 한다’며 소송을 냈고, 텍사스주를 포함한 몇몇 주에서는 역시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급기야 임신중지약 문제는 연방대법원에서 현재 그 가용 범위를 검토하는 데 이르렀고, 그 결과는 올해 6월쯤 나올 것이라 한다. 지금의 보수적인 연방재판소 성격을 볼 때 임신중지약 이용권리가 더욱 축소될 것으로 예상돼 임신중지약 가용 범위 문제는 여성과 젊은 층의 거센 반발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아울러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도 큰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선을 앞둔 조 바이든 대통령은 3월7일 ‘임신중지권’ 이슈에 집중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2년 전에 파기된 ‘로 대 웨이드’ 법의 복원을 약속하며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다.
프랑스의 이번 헌법 개정은 이런 분위기에서 진행된 것이다. 실제 프랑스 자체는 현재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앞으로는 정치적 이유로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점을 미국의 예에서 배운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어떤 정치적 환경도 이를 흔들지 못하도록 명문화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한국, 헌재 판결에도 후속조치 4년째 표류
우리나라는 어떨까? 2019년 4월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에서는 ‘임신중지 금지법(낙태법)’을 ‘낙태를 전면적·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한,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 것에 해당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정부와 국회는 2년 이내에 형법과 모자보건법 등 관련법 개정 및 제도 보완 등 후속조치를 해야 했다. 하지만 국회는 몇 번의 힘없는 발의 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고(사실상 일을 안 하고 있고), 정부는 법 개정의 미비를 이유로 손을 놓은 채 4년을 흘려보냈다. 이 와중에 임신중지를 원하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건강권과 인권은 무시되고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공식적으로 임신중지약을 구할 수 없어 시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임신중지 시술을 하는 의료기관의 공식 정보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결국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이 임신중지가 필요한 여성들은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정보를 검색할 수밖에 없다. 또 임신중지를 건강보험에서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상담을 제외한 모든 비용이 비급여이며, 본인이 다 부담해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임신중지 허용 범위를 제한한 모자보건법이 아직 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고 버틴다.
실제로 임신중지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기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에 의해 진행되는 공적인 ‘퀄리티 조절’은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뿐 아니라 의대에서는 교육과정 안에 ‘임신의 시작·출산’ 등은 있지만 많은 의사가 ‘임신중지’에 대해 배우지 못한다고 고충을 말한다. 정부는 입법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신중지 시술의 건강보험 적용, 유산유도제 도입 등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임신중지약 수입도 불허하고 있다. 오히려 앞으로 ‘미프진’(먹는 낙태약) 단속을 더 강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 임신중지 가이드라인의 책임자 캐론 김(산부인과 전문의)은 지난해 방한해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무엇보다 ‘임신 당사자의 필요와 선택’이 임신중지와 유지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신중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태아 생명의 존엄을 주장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임신 당사자의 생명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정이다.
프랑스의 예에서 보듯이 여성의 성과 재생산권(아기를 가질지에 대해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은 인구 증가, 경제 생산성 등 그 어떤 목적으로도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고, 가장 먼저 인권과 건강권 차원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제3자가 남의 인생을 결정할 수는 없다. 누구라도 자기 인생에 대한 결정권을 자신이 우선적으로 가져야 한다. 태아의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그 책임의 범위는 임신을 한 여성뿐 아니라 임신을 원하지 않으면서 피임 없이 섹스를 하는 남성을 포함해 훨씬 넓어지고 엄중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여성도 가벼운 마음으로 임신중지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비극이다”라고 한 시몬 베이유의 말처럼 어떤 장면에서도 임신중지는 당사자로서 절박한 상황에서의 최후 수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