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조직원 토막살해 후 ‘간 꺼내 먹은’ 폭력조직 영웅파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신흥 조폭으로 악명 떨치며 조직원들끼리 갈등하다 죽여  친구가 살기 위해 “간 꺼내서 먹자”고 제안해 술안주 삼아

2024-02-18     정락인 객원기자
국내 최초로 수감 중인 사형수가 운영하는 블로그가 있다. 그는 동료 조직원을 살해하고 간을 꺼내 나눠 먹은 폭력조직 영웅파 두목 이순철(57)이다. 이씨는 2000년 10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현재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복역 중이다. 그런데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온 지 두 달 후 국내 포털사이트에 이순철의 블로그가 개설된다. 그가 직접 개설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대신 개설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소개란에는 ‘현재 서울구치소에 있는 사형수 이순철’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곳에는 이씨 본인 사진을 포함해 재심청구서, 일기, 나의 수기 등의 글이 올라와 있다. 이씨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 특히 ‘나의 수기’는 지금 당장 책으로 출간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분량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출생과 성장 과정에서부터 범죄 인생을 산 이력, 사건 내용 등이 자세히 적혀있다. 이 블로그는 꾸준히 글이 게시되다 2015년 9월10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올라오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방문자도 5만 명이 넘었다. 이순철은 출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은 듯 “내일을 준비하며 담장 안에서 희망 품으며 둥지를 틀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영웅파 사건과 이순철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일러스트 정찬동

가석방 출소 후 소년원 출신들로 결성

이순철은 13세 때인 1979년 노상강도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15세 때인 1981년 노상강도와 폭력으로 구속됐고, 출소 후 아버지와 갈등을 빚다 가출해 경기도 파주로 올라갔다. 그는 일자리를 찾기보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소년원 동기들과 무리 지어 다니며 패싸움을 벌였다. 이때 갖가지 죄명으로 검거돼 또다시 소년원에 수감된다. 1989년 이씨는 소년원 동기 등 7명과 전남 광양의 한 나이트클럽에 모여 술을 마셨다. 한껏 취기가 오른 후 다른 일행들과 시비가 붙었고 이내 패싸움이 벌어졌다. 상대방 중 한 명이 낫을 들고 달려오자 이씨는 가슴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 허벅지를 두 차례 찔렀다. 이씨 등은 순천역에서 열차를 타고 가다가 남원역에서 경찰에게 체포됐다. 그사이 칼에 찔렸던 피해자가 과다 출혈로 사망하면서 이씨는 살인자가 된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1999년 5월27일 이순철(당시 32세)이 10년8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다. 그는 개과천선하는 대신 더욱 악랄해졌다. 소년원에서 만난 친구와 후배들을 불러모은 후 폭력조직 ‘영웅파’를 결성하고 두목이 된다. 이들은 청부폭력과 사설경호, 보험사기 등의 분야에 손을 대면서 자금을 마련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대전 서구 도마동 주택가에 있는 2층짜리 단독주택을 4000만원에 전세로 얻어 합숙소로 사용했다. 빠르게 돈을 모은 이들은 크라이슬러와 다이너스티 등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두목인 이순철은 합숙소에서 대전의 한 단란주점 마담이었던 애인 강정숙(24)과 동거했다. 1999년 10월22일 새벽 5시쯤 영웅파 조직원들은 대전 서구 탄방동의 한 편의점 앞에서 술을 마셨다. 이 자리에는 이순철과 친구이자 조직원인 창종빈(32), 창씨의 애인과 그의 여자친구 1명, 조직원인 박재범(30), 유덕희(29), 곽종길(29), 정덕수(29) 등이 함께 있었다. 한참 술을 마시던 중 곽종길이 선배들에게 욕설을 하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대전 지역 폭력조직 출신인 곽씨는 평소에도 술을 마시면 선배들을 업신여기는 등 주사가 심한 편이었다. 그때마다 술이 깬 후에는 “형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정말 실수 안 하겠습니다”라며 넘어갔다. 이런 곽종길이 편의점 앞에서 또다시 주사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곽씨는 창종빈의 애인과 함께 온 여성에게 심한 욕설과 함께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까지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창씨가 맥주병을 바닥에 깨트리며 곽종길에게 경고했고, 곽씨가 창씨에게 욕하고 대들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박재범이 곽종길의 머리를 발로 차 넘어뜨렸고, 이후 두서너 번을 더 찼다. 곽씨는 바닥에 넘어진 채 기절했고, 편의점 주인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출동하자 조직원들은 곽씨를 자신들의 승용차(크라이슬러) 뒷자리에 밀어넣고 합숙소로 향한다. 그사이 깨어난 곽씨가 “이 XX놈들아 오늘 나 못 죽이면 내가 너희들 다 죽인다. 아님 다 같이 빵에 가든지 하자”고 말했다. 이때 창종빈이 곽씨를 주먹과 대검 칼자루로 수차례 때려 기절시켰다. 합숙소에 돌아온 곽종길은 다시 깨어난 후에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참다못한 박재범이 벽 쪽에 세워져 있던 야구방망이를 집어들고 사정없이 곽씨를 폭행했다. 곽씨가 맞으면서도 같은 말을 반복하자 격분한 이순철이 다시 야구방망이로 온몸을 무차별 때렸다. 곽씨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이들은 후한을 없애기 위해 곽종길을 죽이기로 의견을 모았다. 창종빈과 박재범은 비밀 유지를 위해 곽종길과 가장 친한 사이였던 유덕희까지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순철은 고민에 빠졌다. 만약 유덕희까지 죽이면 자신들과 동거하고 있던 애인 강정숙도 죽이자고 할 것이 우려됐다. 그래서 그는 유덕희는 살려두기로 하고 따로 설득해 충성 맹세를 받았다.
‘영웅파’ 이순철 등 일당 6명이 1999년 11월4일 대전시 서구 도마2동 자신들의 합숙소에서 벌어진 현장검증에서 살해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영웅파’ 이순철 등 일당 6명이 1999년 11월4일 대전시 서구 도마2동 자신들의 합숙소에서 벌어진 현장검증에서 살해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KBS

괴성 지르며 친구를 찌른 유덕희

그러나 통과의례가 있었다. 영웅파 일당은 기절해 있는 곽종길을 화장실로 옮겼다. 이순철은 유덕희에게 칼을 주며 “네가 먼저 종길이를 칼로 찔러서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보여라. 우리가 진심으로 너를 신뢰할 수 있도록 그 증명을 보이라”고 말했다. 유씨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주춤거리자 이순철이 먼저 곽종길의 복부를 두 번 찔렀다. 그리고 유덕희에게 칼을 줬고, 공포가 절정에 달한 그는 이성을 상실한 채 괴성을 지르면서 친구 곽종길에게 수차례 칼질을 했다. 결국 이렇게 곽종길은 같은 조직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가 10월22일 오전 6시30분쯤이었다. 이순철은 100kg가 넘는 곽종길의 시신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훼손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일당들은 목욕탕에서 회칼로 시신을 토막 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유덕희는 자신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자기를 믿게 하기 위해 “곽종길의 간을 나눠 먹자”고 제안했고, 사체에서 간을 꺼낸 후 한자리에 모였다. 이순철은 옆방에 있던 강정숙까지 불러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 “피로써 충성을 맹세하자”며 떼어낸 간을 소주와 함께 나눠 먹었다. 이들은 토막 난 곽씨 사체의 뼈와 살을 완전히 분리하고, 치아를 부수고 지문을 없애는 등 신원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리고 토막 난 시신을 쓰레기봉투 11개에 나눠 담은 후 승용차에 싣고 이날 오후 3시쯤 유성구 성북동 삼림욕장 부근 야산 계곡에 20m 간격으로 3개의 구덩이를 파고 암매장했다. 이곳은 도로에 가로등이 없고 포장도 안 된 산길로 평소 낮시간에만 3~4대 정도 차량이 지나갈 뿐 밤에는 차량 통행도 없었다. 평일에는 찾는 사람이 없고 주말에만 수십 명 정도 찾아올 뿐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은밀한 범행은 일주일 후 범인 중 한 명이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조직폭력 전담반)에 자수하면서 드러났다. 같은 해 10월29일 서울지검은 대전지검과 공조수사를 벌여 영웅파 조직원 6명 전원을 검거했다. 검찰은 암매장 현장에서 뼈와 살이 따로 흩어져 있는 사체를 발굴해 냈으며 이들의 합숙소에서 현금과 달러, 엔 등 200여만원의 현금과 수표, 예금통장 13개, 칼, 야구방망이 등을 압수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다. 조직원 중 정덕수는 당시 공주의 한 2년제 대학 생활체육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해 11월 실시되는 총학생회장 선거에 1학년 김아무개씨(경찰행정학과)를 러닝메이트로 해서 회장에 입후보했던 것이다. 정씨는 또 ‘무술경호봉사대 회장’ ‘범죄추방운동본부 기획실장’ 등의 직함을 명함에 새겨 넣고 다녔으며 ‘청년무술연합’이란 단체의 신분증도 만들어 소지하고 있었다. 대전지검 특수부는 두목 이순철과 조직원 창종빈, 박재범, 정덕수, 원만식 등에 대해 살인과 사체손괴,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이씨의 애인 강정숙에 대해서는 증거인멸 등 혐의로 각각 구속 기소했다. 1심에서 검찰은 이순철, 박재범, 창종빈, 정덕수 등 4명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유덕희, 원만식 등 3명에게는 각각 징역 7년형을, 강정숙 등 2명에게는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이들은 반인륜적이고 엽기적인 범행을 저질러 같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며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한다”고 구형 이유를 밝혔다. 1심 재판부는 이씨, 박씨, 창씨에게 무기징역, 정씨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또 원씨, 유씨 등 3명에게는 징역 8월에서 징역 2년, 이순철의 동거녀 강씨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는 두목 이씨에 대해 1심보다 높은 사형을 선고하고, 나머지는 기각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를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 데다 살해 후 간을 꺼내 나눠 먹는 등 범행의 흉포성 및 살해 수단과 그 과정의 잔악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며 “사회에 준 엄청난 충격과 죄형 균형이나 인명 경시범에 대한 경고라는 일반 예방적인 면에서도 극형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영웅파의 범행 도구 ⓒMBC

창종빈의 자살과 이순철의 재심 청구

이순철은 “사형제도는 국민의 생명존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헌법에 어긋난다”며 상고했다. 상고심 재판 진행 도중이던 2000년 8월 창종빈은 2m 높이의 창문 쇠창살에 속옷 2개로 이어 만든 끈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교도소 측은 “창씨가 과거에 받았던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하반신 마비와 배뇨장애 증세를 보여 이를 비관해 왔으며, 동료 조직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다 적발돼 금치 2개월의 징벌처분을 받았으나 질병으로 징벌집행이 일시 정지돼 있던 상태였다”고 밝혔다. 같은 해 10월 대법원은 사형제도가 위헌이라는 이씨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순철은 사형수가 된 후 약 7년간 세 번의 자살 시도와 두 번의 탈옥계획을 세웠다가 적발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기독교에 귀의했다. 구치소 안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시험에 합격해 전도사가 됐다고 한다. 그러다 사건 발생 10년 만인 2019년 12월 “나는 주범이 아니다”며 재심을 청구한다. 그는 이때 창종빈의 유서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창씨는 유서에 “이순철은 제가 시켜서 한 일이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법원은 이씨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