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 상속세로 골머리 앓는 재벌가 후계자들

정의선·정기선·담서원 등 경영권 승계와 상속세 부담 ‘이중고’ 높은 상속세율 피해 해외로 눈 돌리는 기업도 등장

2024-02-06     김경수 기자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율은 재벌 기업에도 부담이 되고 있다. 천문학적인 상속세 부담을 줄이고, 미리 승계를 마무리하기 위해 각종 편법이 난무했을 정도다. 일감 몰아주기가 대표적이다. 오너 2세나 3세가 거느리는 비상장 회사를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키운 후, 주력 계열사와 합병하거나 지배구조 꼭대기에 있는 회사의 지분을 인수하는 편법 승계 방식이 그동안 재계에서 공공연히 이뤄져왔다.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확산되면서 공정위와 국세청 등이 팔을 걷어붙였다. 편법적인 부의 승계에 대한 대대적 조사를 벌였고, 적지 않은 총수 일가가 사정기관의 레이더에 걸려 어려움을 겪었다. 때문에 현재는 과거의 방식으로는 세대교체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왼쪽부터)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담서원 오리온 경영관리담당 상무 ⓒ연합뉴스·오리온 제공

정의선, 최소 2조2000억원 필요할 듯

재계 3위인 현대차그룹이 대표적이다. 현대차그룹은 정의선 회장이 취임하면서 3세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하지만 지분 상속 과정은 여전히 안갯속에 빠져있다. 정 회장이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등 핵심 계열사 지분을 거의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정 회장이 부친인 정몽구 명예회장의 지분을 넘겨받아 그룹을 승계하기 위해서는 최소 2조2000억원의 상속세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 명예회장이 가진 현대자동차 지분(5.39%)과 현대모비스 지분(7.19%) 등을 감안한 계산이다. 현대차그룹의 실적이 좋아 주가가 높아질수록 기업 가치는 상승해 상속세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정 회장이 꼭 풀어야 할 숙제는 또 있다.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해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그동안 순환출자 구조 덕에 핵심 계열사들에 대한 낮은 지분율에도 그룹 전반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순환출자 구조가 현대차그룹의 장기 성장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공정위 역시 그동안 여러 차례 그룹을 압박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정 회장의 현대모비스 지분 확보가 필수인데, 최대 6조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재계에서는 지분 상속보다는 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통한 승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은 2018년 현대모비스 AS 모듈 부문을 인적분할해 현대글로비스와 합치고 현대모비스 존속법인을 지배구조 정점에 두는 개편안을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헤지펀드 엘리엇을 중심으로 한 반대에 부닥치면서 결국 계획을 접었다. 전문가들은 “현대차가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전환하는 데 오너의 역할과 일사불란한 그룹의 체질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니만큼 조만간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가 내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지난해 11월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후계자 행보를 본격 시작한 정기선 HD현대 부회장도 상황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정 부회장의 현대HD 지분은 5.26%다. 부친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으로 부터 지분 26.6%를 넘겨받을 경우 6000억원 이상의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 부회장은 세금 재원 마련을 위한 창구가 현재로서는 마땅치 않다. 재계에서는 정 부회장이 향후 HD현대의 배당금을 통해 경영권 지분 승계 작업을 벌일 것으로 예상해 왔다. 실제로 HD현대는 2018년 이후 고배당 기조를 유지 중이다. 특히 HD현대는 배당금 외에 상표권 사용료와 임대료 등 배당을 위한 수입원을 확대하고 있다. HD현대는 2022년 CI(기업 이미지 통합 작업)를 실시했다. 또 계열사 인력 5000여 명을 HD현대가 소유한 분당 신사옥(GRC)에 입주시켰다. 이를 통해 계열사들로부터 상표권과 임대료를 받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매년 700억원대 추가 수익이 생겼다는 평가가 나오는 대목이다. 핵심 계열사의 IPO를 통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마린솔루션(옛 현대글로벌서비스), 오일뱅크 등 계열사 기업공개를 통해 투자를 유치한 후 HD현대에 대한 배당을 늘려 자금을 마련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오리온가(家)는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의 장남인 담서원 오리온 상무를 중심으로 승계 작업을 진행했다가 편법 승계 논란에 휩싸였다. 그 중심에는 담 상무가 2013년 인수한 중국 랑방애보포장유한공사(랑방애보)가 있다. 이 회사는 오리온그룹의 중국 계열사들에 포장재 등을 납품하며 안정적인 매출을 올려왔다. 그러나 담 상무는 2015년 랑방애보를 중국 오리온푸드에 매각했다. 승계 자금 창구를 잃게 된 것이다. 재계에서는 이후 이뤄진 오리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이 승계 자금 마련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오리온그룹은 2017년 지주사 체제로 전환했다. 오리온을 지주사인 오리온홀딩스와 사업회사 오리온으로 인적분할한 것이다. 이후 담 회장 일가는 오리온 지분을 현물출자해 오리온홀딩스 지분율을 63.80%까지 끌어올렸다. 오리온홀딩스는 이후 매년 순이익을 상회하는 고배당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배당 규모는 지배구조 개편이 이뤄진 2017년 205억원의 배당 결정을 내린 데 이어 2018년 215억원, 2019년 231억원, 2020년 251억원, 2021년 331억원, 2022년 421억원 등으로 매년 증가했다. 재계에서는 담 상무가 담 회장과 이 부회장에게서 증여받은 현금을 바탕으로 오리온홀딩스 지분 매입에 나설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기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1월17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네 번째, 상생의 금융, 기회의 사다리 확대’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창걸·박현주·서정진 회장은 “승계 포기”

부영그룹은 어떨까.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현재 고령으로, 사실상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별다른 대책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향후 자녀들에게 지분이 넘어가면, 기업 매각 가능성이 높게 제기되고 있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은 옥살이를 하느라 승계 준비를 제대로 못 했고, 신동빈 롯데 회장 아들은 최근 경영 수업 중이어서 아직 승계를 논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근로소득을 크게 넘어서는 다른 소득원을 마련하거나,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온전한 승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들 3~4세 경영인이 상속세에 대비할 방법으론 대규모 대출, M&A(인수합병)를 통한 지분 희석, 지분 현물납부 및 매각 등이 있다. 다만 모든 방법이 큰 부작용과 함께 기업 경영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라, 오너 일가를 위한 상속세 마련이 그룹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승계 걸림돌’인 상속세를 못 이겨 경영권을 못 물려주거나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국내 1위 가구 및 인테리어 업체인 한샘이 대표적이다. 창업주인 조창걸 전 한샘 회장은 2021년 7월 한샘 매각에 나서 본인(15.45%)과 특수관계인 7명 등의 지분 27.7%를 IMM 프라이빗에쿼티(PE)에 매각했다. 당시 한샘은 코로나 팬데믹에도 양호한 실적을 기록하면서 안정적 성장세를 이끌어왔다. 그래서 매각 소식에 의아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국내 상속세가 조 전 회장으로 하여금 매각을 선택하게 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과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역시 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못 박은 상황이다. 주식 상속세가 급격히 늘면서 이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서 회장은 지난해 3월 열린 주주총회에서 “저는 오직 제 이름으로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 부인과 자식 이름으로 보유한 주식이 없다”며 “주주들의 우려대로 최대주주로 경영권 행사 가능성이 없다. 상속세 때문에 내가 죽으면 국영기업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1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대대적인 지분 매각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셀트리온은 국유화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로 풀이된다.  

싱가포르는 왜 상속·증여세 폐지했나

재계 일각에서는 무거운 상속세가 기업 가치 상승을 막아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 증시가 경제 수준이 비슷한 나라에 비해 저평가받는 게 상속세 탓이라는 것이다. 상속세가 높다 보니 대주주는 주가가 오르는 게 달갑지 않다. 오히려 낮은 주가를 선호한다. 주가 부양에 도움이 되는 배당 등 주주 환원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높은 상속세율을 피해 ‘엑소더스(자금 따위가 어떤 지역이나 상황에서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일)’가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에 부담을 크게 느낀 국내 기업인과 자산가들이 싱가포르로 떠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가 상속세 부담을 느끼는 부자들을 끌어들이고자 2008년 상속·증여세를 없앴기 때문이다. 양도세와 배당세도 없다. 법인세와 소득세 역시 상대적으로 낮게 과세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절세 목적’으로 싱가포르로 이주하거나, 싱가포르에 투자법인을 설립하는 한국인 부자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최고 60%에 달하는 상속·증여세율로 고민하는 기업인들이 이런 세금 혜택 소식을 들으면 당연히 솔깃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견기업의 한 관계자는 “수년 전, 오너 승계 문제로 법인을 활용한 기업 승계를 다양하게 검토했지만, 현행법에 따르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현재 싱가포르로 본사와 공장을 옮기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국가의 경쟁력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은 지난해 11월27일 세제 관련 토론회에서 “오늘날 상속·증여세는 변화된 현실에 맞지 않아 오히려 국민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며 “유산세 방식과 유산취득세 방식을 비교·검토해 필요하다면 상속·증여세 폐지라는 과감한 시도도 검토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도 이러한 탈한국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기업 승계를 악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삼성과 현대차 등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상속세 부담으로 해체되거나 탈한국을 선택한다면, 국내 경제에 더 큰 재앙이 닥칠 가능성도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