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청년들은 왜 제3 후보에 열광했을까 [임명묵의 MZ학 개론]
총통 선거 등에서 여야의 ‘친중’ ‘반중’ 대립보다 일자리·주거 문제에 더 관심 대만과 정치·사회 환경 비슷한 한국에도 시사점 커
1월13일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만 총통 선거가 치러졌다. 현재 대만이 세계의 산업, 군사, 지정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세계적인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 선거였다. 세계 반도체의 중심인 대만이 미국과 중국 중 어느 곳으로 향할지, 대만과 중국 대륙의 관계가 악화될 때 정말 전쟁 같은 극단적인 사태가 펼쳐질지를 이번 선거를 통해 가늠하고자 하는 이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과 민진당이라는 대만의 양대 정당은 양안 관계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했다. 장제스와 장징궈의 개발독재를 통해 대만 경제를 성장시키고 이후 공산당과의 유대 관계를 발전시킨 국민당의 입장은 대만이 여전히 대륙을 필요로 하며, 무리한 반중 정책이 전쟁까지도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쪽이었다. 반면 대만의 민주화 세력이 연합한 민진당은 대륙과의 관계가 심화될수록 대만은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삶의 가치를 대륙의 공산당에 의해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구도에서 보자면, 이번 선거 결과는 결국 대만인들이 민진당의 라이칭더를 택하면서 중국과 ‘헤어질 결심’을 공표한 셈이다.
하지만 대륙과 대만 간 양안 관계에만 집중한 이와 같은 분석은 대만 선거를 외부인의 시각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일 수 있다. 라이칭더가 상대적으로 적은 40%라는 득표율로 당선된 것, 총통 선거와 동시에 진행된 입법원 선거에서는 국민당이 제1당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나타난 것만 봐도 그렇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제3당인 민중당 후보 커원저였다. 커원저는 2030세대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약진했고 실제 선거에서도 26%라는 상당한 표를 얻었다. 민진당의 승리 자체가 민심의 확인이라기보다는 국민당과 민중당 등 야권 분열에 따른 어부지리라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대만의 청년층은 왜 전통적 양당 대신 커원저를 밀어올렸을까?
한국의 ‘헬조선’ 떠올리는 대만의 ‘귀신섬’
민주화 이후 대만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중국 경제에 의존하며 성장했다. 대륙으로 향하는 수출과 투자를 주도한 것은 장제스와 국민당을 따라 본토에서 건너온, 대륙 출신 외성인들이었다. 그러나 대만 경제가 성장하는 사이에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대만 경제의 고질적 문제인 저임금이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대륙과 연계된 영역에서 부가 창출되니 불평등이 고착화되었고, 특히 대륙 자본의 유입으로 부동산 양극화가 극심해졌다. 경제적 기반이 약한 청년층의 불만이 가시화되면서 대만 인터넷에는 한국의 ‘헬조선’을 떠올리게 하는 ‘귀신섬(鬼島)’이란 말까지 유행했다.
삶의 조건이 개선되지 않는 가운데 중국의 영향력은 경제를 넘어 정치와 문화, 일상생활까지 침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2014년에 홍콩의 민주화 시위가 공산당에 의해 진압되면서, 대만 청년층은 중국공산당이 제안하는 일국양제 통일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커졌다. 2015년 대만 출신 K팝 아이돌 쯔위가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대만 국기를 들었다가 중국 네티즌의 집단적인 사이버 공격을 받고 사과까지 한 사건은 대륙에 대한 대만 청년층의 반감에 불을 지른 사건이 되었다. 2016년 선거에서는 청년표가 대륙과의 관계를 중시한 국민당에 대한 정권심판론으로 쏠렸고,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은 국민당보다 25% 많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압승했다.
재선까지 성공해 8년에 걸쳐 대만을 통치한 차이잉원 정부는 대륙에 의존하지 않는 외교를 통해 대만의 난국을 타개하겠다고 공약했다. 신남방 정책으로 동남아시아 무역을 늘리고, 대만과 ‘가치’를 공유하는 미국·일본과 밀착 협력해 안보와 경제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차이잉원의 등장과 함께 양안 관계가 악화되었고, 미국·일본은 중국과 더 전면적으로 경쟁에 나서며 서구 세계에서 대만 방위에 쏟는 관심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미국·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대만이 집중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반도체였다. 중국을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경제전쟁이 가시화되면서 안 그래도 중요한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은 훨씬 더 커졌다. TSMC·폭스콘·미디어텍 같은 반도체·IT 산업에 집중해 대만 경제의 도약을 이끈 차이잉원 정부는 최근 대만의 1인당 GDP가 한국을 넘어선 것을 민진당의 대표적 치적으로 홍보했다.
민진당과 국민당의 격화된 갈등에 지쳐
그러나 차이잉원 정부가 대만 청년층이 느끼는 불만을 본질적으로 해결해줄 수 없음이 드러났다. 최첨단 산업인 반도체 부문의 성장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지 않았고, 고질적 저임금과 부동산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륙과의 긴장이 높아지면서 ‘유커’로 유명한 중국 관광객이 급감했고, 대만의 서민 경제에 직접 체감되는 내수가 위축되었다. 모병제로 전환한 대만군도 2024년부터는 1년 의무복무의 징병제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민진당 정권이 8년간 이어지면서 정치인 부패 스캔들도 잦아졌다. 국민당은 민진당이 문제를 실제 해결한 것은 없고, 전쟁만 부추긴다면서 정권교체를 호소했다.
국민당 마잉주 8년, 민진당 차이잉원 8년을 거치며 격화된 양당 갈등에 지친 청년층이 주목한 것은 의사 출신 제3 세력인 커원저였다. 커원저는 가장 첨예한 주제인 양안 문제에서 모호한 입장을 보이는 대신, 청년층이 실제로 체감하는 일자리·주거·경제 문제에 집중하면서 지지를 얻었다.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기존의 고착된 대립 구도를 넘어서는 신선함이 ‘커원저 돌풍’의 비결이었다.
커원저가 양당 구도를 뚫고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얻은 26%라는 놀라운 득표율, 그리고 주요 지지층이 2030세대라는 것은 향후 대만 민심을 가늠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일극화되는 대만의 국토와 부동산 문제, 고부가가치 영역과 그렇지 못한 영역 사이의 괴리, 미국 혹은 대륙으로 향하는 ‘관시(관계)’가 있는 이들과 대만을 터전으로 삼는 이들의 차이 등. 양안 관계는 물론 대만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지만, 결국에는 양안 관계 또한 대만인들의 실제적인 삶을 바꾸는 정책과 연계될 때 유권자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올 수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대만과 차이도 많지만, 한국 정치 지형도 대만과 유사점이 많다. 미·중 사이에 ‘끼인’ 국가라는 점, 서울과 지방의 극심한 차이와 부동산 및 일자리 문제 등 대내외적 상황이 비슷하고, 한편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라는 양당의 고착화된 대립 구도에서도, 청년층이 양당에 실망해 표심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에서도 익숙함이 느껴진다. 그러니 한국의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이라면, 시간을 들여 향후 민진당 라이칭더 정권과 다크호스 커원저의 행보에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