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통한 ‘과거 들여다보기’로 포용적 미래 만들어야 [김동진의 다른 시선]

과거의 실수나 비참했던 사건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어…현재 문제 해결하거나 미래 설계하는 일에 나침반 역할

2023-12-31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코로나19 시기를 겪으며 극장이 불황이라고 하는 가운데, 영화 《서울의 봄》이 2023년도 두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연일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지난해 유일한 천만 관객 영화였던 《범죄도시3》를 이미 제쳤다. 이 영화는 1979년 12·12 군사반란 사건을 다룬 극영화로, 그날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 사이의 9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영화적인 상상력을 가미해 재구성해 141분의 러닝타임 안에 담아냈다.

2000년대 한국 영화계에는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꽤 존재했으며, 한때 영화 흥행을 판단하는 척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각종 OTT 플랫폼이 많아짐에 따라 과거에 영화관을 찾던 관객들은 집 안에서, 혹은 장소 불문하고 내 손안에 있는 휴대폰으로 수많은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이제 시청자들은 유튜브 등을 통해 다양한 영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젊은 세대들은 ‘틱톡’ 같은 짧은 길이의 영상을 선호하게 되어,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더라도 영화 줄거리를 요약해 보여주는 유튜브를 보거나 아예 영화를 보지 않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만 관객이라니, 이는 코로나19 이전의 천만 관객보다도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다.

2023년도 최고의 흥행작이 된 ≪서울의 봄≫. 관객 수 1000만 명을 넘어 ≪범죄도시3≫의 성적을 뛰어넘었다. 서울 용산CGV의 티켓 구매 키오스크 옆에 ≪서울의 봄≫ 포스터가 걸려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서울의 봄》 보며 김진아 감독의 VR 연작 떠올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다룬 다큐멘터리처럼 이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김성수 감독은 실제 사건을 다루면서도 관객의 주의를 잡아끌 수 있는 영화적인 장치들을 매우 잘 활용했다. 해당 사건이 일어났던 날의 9시간 동안에 집중한 설정 자체뿐 아니라 영화 후반부에는 그야말로 초를 재가며 급박한 상황을 보여주어,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는 관객들도 긴장감을 놓지 않게 만든다. 또한 실제 인물과는 조금 다르게 소위 ‘멋있는 영웅’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태신(실제 인물 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역에 극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실제 존재하지 않았던 광화문 대치 장면을 공들여 찍었다.

여기에 이태신 역의 정우성뿐 아니라 전두광(실제 인물 전두환) 역의 황정민, 노태건(실제 인물 노태우) 역의 박해준, 이 밖에도 많은 연기파 배우가 모여 각 캐릭터의 특징을 잘 드러냈다. 또한 악인과 선인을 극명히 대비시킨 구도뿐 아니라, 탐욕과 권력욕, 원칙과 책임감 사이에서 때로 계산하거나 무언가를 포기하며 그날 밤 흔들렸던 인간 군상의 모습을 여러 인물을 통해 입체적으로 잘 드러냈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모두가 아는 사건임에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이목을 잡아끈다. 1979년도의 사건이니 그 시대를 살았던 중장년층 관객이 많이 볼 법도 하지만, 놀랍게도 절반이 넘는 관객은 2030세대다. 젊은 층 사이에서는 이미 ‘서울의 봄 심박수 챌린지’가 유행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도 화가 나서 심박수가 올라간다며, 영화를 보기 전과 후의 심박수를 스마트워치 등으로 확인해 SNS에 인증하는 것이다. 또한 관객들이 영화 관람 후 12·12 군사반란이나 그와 관련된 10·26 사건, 5·17 쿠데타 등 역사적인 사실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더 나아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후기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든 김성수 감독은 12·12 사건 당시 서울 한남동에 거주하던 고등학생이었으며 여러 번 울리던 총성을 직접 들었다고 한다. 사건에 직접 연루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총성을 직접 들었으니 경험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날 그 총성의 의미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인터뷰 내용은 필자에게는 미군 위안부를 다룬 VR 연작 영화를 만든 김진아 감독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다.

현재 미국 UCLA의 영화학과 교수이기도 한 김진아 감독은 1992년 경기도 동두천의 기지촌에서 일하던 미군 위안부 윤금이씨가 주한 미군인 케네스 마클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른바 윤금이 사건 당시 대학생으로 그 사건을 경험했다. 당시 대학생 운동권 및 여러 언론에서 심하게 훼손된 피해자의 사체 사진을 그대로 기사로 내보내며 정치적으로 이용하던 한가운데에서, 불편감을 표현할 언어를 알지 못했던 김진아 감독은 후에 페미니즘 언어에서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그가 만든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이슈에 가려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던 미군 위안부에 관한 것이었다.

 

《동두천》 등 3편, 미군 위안부 문제 인식시켜

마치 일본군 위안부처럼 미군 위안부의 상당수 역시 인신매매를 통해 끌려간 미성년자들이었으며, 한국 정부는 ‘달러벌이 역군’이라는 이름으로 미군 대상 성매매를 장려하기까지 했다. 미군 위안부 여성들에게 행해진 인권 유린은 심각했다. 인신매매로 팔려온 피해 여성이 기지촌을 탈출해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이 그 여성을 도로 포주에게 데려가기도 했다. 주한미군 사이에 성병이 유행하자 정부는 접촉자로 지목된 여성들을 ‘몽키 하우스’라고 불리는 수용소에 보내 성병 검사를 실시했고, 성병에 걸린 여성들이 완치될 때까지 수용소에서 일반 의료행위보다 매우 과도한 양의 페니실린을 투약해 상당수 여성이 쇼크로 사망하게 만들었다.

김진아 감독은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세 편의 연작 단편 VR 영화로 만들었다. 2017년작 《동두천》은 살해된 여성의 그날의 행적을 따라가볼 수 있는 영화다. 2021년작 《소요산》은 성병 낙검자 수용소인 ‘몽키 하우스’를 재현했다. 또한 관객들이 태블릿 속 화면을 통해 실제 수용소 안 복도를 걸어가는 체험을 하도록 만든 XR과, 지금도 폐건물로 남아있는 몽키 하우스를 휴대폰 너머로 조망해볼 수 있게 하는 AR을 통해 과거의 사건을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한다. 2023년작 《아메리칸 타운》은 군산의 미공군기지 인근에 설립되었던 기지촌인 아메리칸 타운의 일상을 보여준다.

김성수 감독의 극영화 《서울의 봄》과 김진아 감독의 VR 연작은 과거를 조명한다는 의미에서 서로 닮아 있다. 《서울의 봄》은 대중적인 흥행 요소를 갖추어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끌어들이면서, 현재를 사는 관객들이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한다. 미군 위안부 연작 VR 영화들은 VR 장비가 있어야 관람이 가능한 상황 때문에 아쉽게도 많은 관객을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어디에서도 배우지 않아 모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해당 문제를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역사를 인식하는 것은 단지 과거를 이해할 뿐 아니라 현재를 살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에 매우 중요하다. 때로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발생한 역사는 우리 사회를 형성해온 사건과 결정들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과거의 성공적인 사건뿐 아니라 실수나 비참했던 사건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으며, 그러한 배움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미래를 설계하는 데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다. 더 많은 우리 사회 구성원이 《서울의 봄》이나 김진아 감독의 VR 연작 같은 좋은 영화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봄으로써 현재를 성찰하고 좀 더 포용적인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을 함께 하기를 바라본다.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