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길 선택한 밀레이의 경제 실험 [최준영의 경제 바로읽기]
무명의 경제학자 출신 하원의원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파격 당선 달러를 자국 화폐로 사용하는 ‘달러라이제이션’의 결과는?
아르헨티나 국민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11월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무정부주의 자본주의자’를 자청하는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밀레이는 “무분별한 정부 지출을 전기톱으로 무자비하게 잘라버리겠다”는 공약으로 한순간에 주목을 받았다. 결국 무명의 경제학자 출신 하원의원에서 대통령이 되는 기적을 연출했다. 밀레이의 공약과 발언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국민은 기존 정치인들과 완전히 다른 노선을 주장하는 밀레이를 지지함으로써 변화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현재 상황보다는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과 기존 정치권에 대한 환멸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거대한 경제적 실험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올 상반기 149% 인플레이션 기록
2023년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상반기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은 149%에 달했다. 국가 부도 상태인 베네수엘라와 레바논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외환보유고는 마이너스를 기록한 지 오래였다. 아르헨티나 통화인 페소는 암시장에서 40% 이상 하락하면서 통화로서의 가치를 상실했고 실업률은 20% 넘게 치솟았다. 통화가치 하락에 따라 기준금리를 133%로 인상하고, 통화가치 하락을 상쇄하기 위해 2000페소 신권을 발행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국가부채는 현재 382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과거 여러 차례 경제위기를 겪었다. 가장 최근의 위기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지속됐는데, 현재 상황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90%를 넘는 부채에 시달리고 있던 아르헨티나는 2018년 IMF(국제통화기금)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IMF는 570억 달러를 지원했고, 2022년에도 44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IMF는 지원의 대가로 재정적자 감소, 외환보유고 확충 등의 조건을 내걸었지만 1년이 지난 현재까지 대부분의 조건은 충족되지 않고 있다. 2020년 디폴트 선언 이후 아르헨티나는 국제 금융시장으로부터 차단돼 있는 상태다. 재정적자는 매년 GDP의 3% 규모에 이르고 있다. 지난 6월 위기에 몰린 아르헨티나는 중국과 체결한 182억 달러 규모의 스와프 협정과 별도로 50억 달러의 추가 지원을 약속받으면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있었다.
무분별한 정부의 재정운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 정부는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면서 증세보다는 ‘통화증발’을 선택했다. 이렇게 찍어낸 돈으로 에너지, 의료, 대중교통 등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국민의 불만을 다독여왔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바람직한 선택일지 모르겠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선택은 끊임없는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여기에 더해 아르헨티나 국민은 금융과 예금 자체에 대한 신뢰가 없다. 2001년 경제위기 당시 930억 달러 규모의 디폴트를 해결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는 국민의 예금계좌를 몰수한 후 마음대로 인출했기 때문이다.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금융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정부 스스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특유의 ‘페론주의’도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과거 대통령을 역임했던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이 추구했던 이념을 가리키는 페론주의는 산업 국유화와 복지·공공지출 확대, 현금성 보조금 지급, 인금 인상 등 대중영합적 포퓰리즘적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페론 대통령의 실험은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그 영향력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정치적 세력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 정치권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공공부문 확대를 통한 채용과 연금 지급을 채택해 왔다. 사실 이러한 방식은 대다수 남미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20년 동안 아르헨티나의 공공부문은 두 배 규모로 커졌다. 정치적 타협에 따른 공공부문의 지속적인 확대는 국가가 감당해야 하는 인건비 및 연금 규모 확대로 이어지면서 정부의 부채와 차입을 증가시키는 핵심 요인으로 지목돼 왔다.
밀레이는 무엇보다도 ‘공공부문 축소’를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고, 국민은 이에 대해 열광적으로 동조했다. 당선 직후 밀레이는 인터뷰에서 국영 석유회사와 국영 방송국을 모두 민영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민간부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민간이 하도록 할 것이라는 게 그의 다짐이었다. 정부 부처를 18개에서 8개로 줄이고, GDP의 38%에 달하는 정부 지출을 15% 수준까지 감축할 것이라는 그의 공약은 현실성이 없어 보이지만 아르헨티나 국민은 어떠한 충격요법도 감내할 테니 상황을 개선해 달라고 지지를 보낸 것이다.
밀레이의 또 다른 공약인 중앙은행과 페소화를 폐지하고 달러를 사용하겠다는 구상은 과격하게 들리지만 사실 매우 현실적이다. 세계적으로 독자적인 통화정책 대신 달러나 유로와 연계해 환율을 고정시키거나 아예 자국 화폐 대신 달러와 유로를 사용하고 있는 국가는 의외로 많다. 현재 66개국이 자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하거나 달러를 법정통화로 사용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1991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페소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페그제를 10년 동안 시행한 바 있다. 하지만 대규모 경제위기로 인해 페그제는 중단됐고 대규모 통화가치 폭락 사태가 발생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변화 위해선 넘어야 할 산도 많아
밀레이가 하고자 하는 것은 페그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달러를 자국 화폐로 사용하는 일명 ‘달러라이제이션’이다.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만 아르헨티나는 미국 이외의 국가 가운데 달러 지폐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로 추정되고 있다. 약 23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달러가 현금으로 아르헨티나 국민의 금고와 이불 사이, 서랍 등에 보관돼 있다. 오랜 인플레이션에 따른 페소의 불안으로 이미 아르헨티나는 달러를 자국 통화 대신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현실을 공식화겠다는 것이다. 통화가치 하락 우려가 없는 달러를 법정화폐로 사용할 경우 보관하고 있던 달러가 유통되면서 경제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독자적인 통화정책은 포기해야 하지만, 가치를 상실한 페소를 고려해볼 때 오히려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밀레이 앞에는 큰 어려움도 산적해 있다. 대규모 지출 삭감을 포함한 예산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정부 부채의 이자 지급을 줄이기 위한 채무 조정에도 나서야 한다. 또한 IMF가 제시하고 있는 경제 개혁 조치를 신속하게 이행함으로써 외환보유고를 확충해야만 달러화 사용을 위한 기반을 만들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 실험이 과연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세계는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