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통해 ‘다음’으로 나아가는 방법 제시하는 《콩트가 시작된다》
무명 개그맨 3인방 해체 과정 그린 일본 드라마…‘성취’가 아닌 ‘정성스러운 포기’ 선택
《개그콘서트》가 막을 내렸던 2020년 6월을 기억한다. 무려 21년간 무심하게 이어져온 일요일 밤의 어떤 관성이 툭 하고 끊기는 기분을 느꼈다. 출연자들의 일부는 다른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채널을 통해 여전히 활약을 이어갔지만, 또 다른 일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을 웃기는 게 좋아 무대에 오르다가 하루아침에 설 곳을 잃은 이들을 종종 생각했다. 다 어디로 간 걸까. 개그는 어디까지나 그들 인생의 일부일 뿐 전체는 아니겠지만, 습관 같았을 일과가 사라진 이후의 일상도 잘 이어지고 있을까. 여전히 개그를 사랑할까. 그러다 일본 드라마 《콩트가 시작된다》**를 만났다. 3인조 무명 콩트 그룹 맥베스가 거의 아무런 반향이 없던 10년간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해체하기까지의 과정. 맥없는 콩트가 매회 등장하고, 대단한 반전이나 멋있는 기적은 한 톨도 일어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볼 때마다 사람을 펑펑 울리는 희한한 매력이 있었다.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꿈을 포기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다.
콩트 3인방, 해체를 결심하다
어느 라멘 가게. 어떤 ‘물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전문가가 찾아온다. 의뢰를 부탁한 사람은 가게 주인. 그는 손만 댔다 하면 모든 물을 멜론 소다로 만들어버리는 아르바이트생 때문에 골치를 앓는 중이다. 멜론 소다 맛이 나는 라멘은 아무래도 곤란하다. 변기 물까지 멜론 소다로 바꾸면 더 심란하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은 이 콩트가 기대되는가. 안타깝지만 짐작대로다. 어설픈 분장과 조악한 세트, 과장 가득한 연기력의 삼박자를 두루 갖춘 맥베스의 콩트는 소수의 마니아가 있을진 몰라도 사람들 대부분에게 시시한 농담 취급을 받는다.게을렀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활동은 더할 나위 없이 꾸준하고 성실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새 콩트를 위한 회의도 했다. 고등학교 축제 때 처음으로 콩트 공연을 선보인 직후 문학 선생님에게서 듣게 된 “재능 있다”는 한마디에 그만 가슴이 뛰어버린 하루토(스다 마사키)와 쥰페이(나카노 다이가), 졸업 후 프로게이머의 삶을 살다가 돌연 이들에게 합류한 타(가미키 류노스케)까지 세 친구는 지금껏 콩트에 진심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스물아홉. ‘데뷔 10년이 지나도 가망이 없다면 해산’을 목표로 활동했던 맥베스 팀원들은 약속한 10년을 맞이한다. 오래된 연인과의 결혼 문제나, 생계를 위해 이어온 아르바이트의 정규직 전환 제안 등도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했던 공개 오디션에서마저 무참히 실패한 이들은 결국 덤덤하게 해산을 준비한다. 이 소식에 절망하는 사람은 맥베스의 열성 팬 리호코(아리무라 가스미)뿐이다. 회사를 그만둔 후 모든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 숨만 쉬며 살아가던 리호코가 다시 웃게 된 것은 맥베스의 콩트 때문이었다. 맥베스의 활동 종료까지 단 2개월 남은 상황. 리호코의 마음은 안타깝고 다급하다.
진정한 콩트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적당히’가 꼭 나쁠까
사연의 세부 내용이야 각각 다르지만 이들 모두는 어느 날 문득 비슷한 의문을 떠올렸을 사람들이다. 나, 혹시 지금까지 틀린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온 게 아닐까. 해체를 앞둔 어느 날, 맥베스는 이 같은 의심을 확실한 격려로써 다시 한번 다잡기 위해 애초에 그들에게 개그맨의 길을 걷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문학 선생님을 만난다. 그는 하루토와 쥰페이의 재능을 알아채준 사람이니, 여전히 그의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조심스레 운을 뗀 문학 선생님의 한마디는 다분히 현실적이다. “이제 해체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우리 모두 믿고 싶어 한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러나 어느 순간 절실히 깨닫는다. 꿈을 이룰 확률은 희박하다. 맥베스의 10년간의 활동은 그야말로 별 볼일 없었다. 열심히 한다는 것만이 꼭 모든 일의 능사도 아니다. 타고난 자신의 책임감과 성실함을 악용하는 이들 때문에 조금씩 지쳐 갔던 리호코는 “지금도 열심히 하는 게 무서워서 대충할 수 있는 건 대충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는 마음을 억누르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며 눈물을 흘리는 리호코에게서는, 무기력한 포기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했던 사람의 상처가 어른거린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다는 환상 위에 세워진 시대는 동시에 비대한 박탈감을 키워낸다. 누구나 꿈을 향해 자유롭게 달려갈 수 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명확한 꿈과 목표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쓸모를 고민해야 한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기 자신을 얼마든지 우월하게 마케팅할 수 있는 시대에 빛나지 않는 일상은 시시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포기는 은은한 죄책감마저 부추긴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럴 일인가. 꿈을 향해 지치지 않고 달려가고, 결국 어떤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청춘 서사’의 평균인 것처럼 부추기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성취가 아닌 포기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데 일부러 공들여 시간을 쓰는 이 작품의 시선은 귀하다. 정작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꿈을 향한 다짐보다, 숱한 노력 끝에도 결실을 맺지 못한 무언가를 포기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했다면 꿈은 포기해도 된다. 평범하고 꾸준한 인생도 각자의 무대에서는 값진 드라마다. 오랜 세월 동안 주변의 잡음에 흔들리지 않은 요령 없는 뚝심과, 한심한 일에도 많은 이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안고 버텨온 시간들. 그건 꼭 실패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떻게 꿈이 이루어지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꿈을 접는가. 한때 내가 온 열정을 쏟았던 한 시절을 어떻게 잘 놓아주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코끝 찡한 《콩트가 시작된다》의 미덕은 이토록 정성스러운 포기에 있다. 맥베스로서 함께 서는 무대는 끝나지만, 하루토와 친구들 각자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막이 오르는 인생의 무대가 펼쳐진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콩트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때론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백스테이지의 어둠을 더 길게 마주하고,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이 되는 순간이 더 길더라도 소화해야만 하는 콩트. 지칠 때는 ‘적당히’를 모토로 삼아 보면 어떨까. 언젠가 하루토와 리호코가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 분명 힘이 될 것이다. “인생을 그렇게 적당하게 정해도 되나요?”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2021년 일본 NTV 2분기 드라마로 방영한 10부작 드라마. 국내에서는 OTT 플랫폼 왓챠, 애플TV+를 통해 시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