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캉스’ 말고 ‘촌캉스’ 어때? ‘치유’ 앞세운 고창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세계문화유산’ 등재 전북 고창군, 제각각이던 자원, ‘치유’로 한 데 묶어
전북 고창군 홍보 팸플릿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도시’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고인돌 유적, 자연유산인 갯벌, 인류무형문화유산이라는 판소리와 농악이 고창에서 많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창에 위치한 운곡 습지는 2011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으며, 고창군 전 지역이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고창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도시라 부를만한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요한 알맹이가 빠져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나하나 유명한 것들은 많지만 딱히 고창만이 갖고 있는 무엇이랄 게 없다. 고인돌 유적은 화순, 강화 지역도 함께 포함된 것이고 갯벌, 판소리, 농악 역시 고창에서‘도’ 유명하다는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람사르 습지는 24개에 달하며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은 모두 9곳이나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이 모두 소중한 자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네스코란 이름 외에는 하나로 연결되는 주제가 없다. 이탈리아 피렌체처럼 도시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아니다. 고창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도시란 표현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문화, 어머니의 약손이 되다’ 슬로건 걸고 우울‧혐오 치유
고창만의 특별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6차 산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고창군 상하면에 문을 연 ‘상하농원’에 단연 주목한다. 매일유업에서 만든 상하농원은 ‘농업’을 테마로 한 복합여가공간으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평화롭고 정겨운 농촌 풍경이 실제로 펼쳐져 있는 곳이다. 여기서는 농산가공품들이 생산되고, 그것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며, 새로운 농업기술을 제안한다. 식품제조업 분야에서나 농촌관광의 관점에서나 흔하지 않은 혁신적인 사례다.
한편 승마동호인들 사이에서는 명사십리라고도 불리는 고창해변이 유명하다. 제주도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일명 ‘해변승마’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 알려져 있다. 8km 이상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탁 트인 해변은 말을 타고 달리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이다.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라 꼭 승마를 하지 않더라도 일몰을 보러 다녀올 만하다는 것이 이 지역 사람들 이야기다.
고창읍성 내에 숨겨진 대나무숲 ‘맹종죽림’도 고창 주민들이 자신 있게 추천하는 명소다. 성곽 안 숲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곧게 하늘로 뻗은 대나무들이 울창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마치 사극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광경이다. 전국에 유명한 대나무 숲길들이 있지만 우리나라 3대 읍성으로 꼽히는 문화유산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고창의 맹종죽림을 더욱 특별한 장소로 만든다.
유네스코 유산이라는 타이틀이 사람들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환경이 기반을 이루고 있을 때 비로소 매력적인 자산이 탄생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 자원들을 하나로 엮기 위해 고창이 새롭게 추구하고 있는 테마는 ‘치유’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멀어진 사회적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울과 혐오의 감정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기에 고창군이 제안한 ‘문화, 어머니의 약손이 되다’라는 슬로건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지난 12월 고창군이 문화체육관광부이 주관하는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된 데에는 이런 배경도 중요한 요인이 됐을 것이다.
“입구 들어서는 순간 평온을 느꼈다”
바야흐로 ‘호캉스’가 저물고 ‘촌캉스’가 떠오르고 있다. 고즈넉한 공기가 몸과 마음을 감싸는 시골의 정취가 화려하고 안락한 호텔보다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처방인 것일 테다. 고창군 신림면 어느 작은 마을에는 한 사람이 10년 동안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가꾸어 나가고 있는 문화공간이 있다. 지역 내에서보다 외지에서 먼저 가치를 알아보고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이곳에 이제는 그 노하우를 배우고자 하는 발걸음이 연일 이어진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의 평온을 느꼈다’는 후기에서 진정성이 담긴 공간이 얼마나 묵직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곳이었다.
치유라는 테마 역시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역 사람, 자연, 역사가 만들어내는 문화는 결코 복제될 수 없다. 그럴싸한 외형보다 지역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본질에서부터 출발하는 콘텐츠들로 현대인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치유도시 고창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