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집에서 가까운 버스정류장 부근에 현수막 하나가 내걸렸다. “민생 뒷전, 방탄국회 규탄, 민생보다 ‘그분이’ 먼저입니까?”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인 야당에 의해 부결된 것을 부각해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방어를 예행연습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국민의힘 측이 제작해 부착한 현수막이었다. 민주당이 민생에는 별 관심 없이 대표를 위한 ‘방탄’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대중에게 알리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내용이다. ‘민생 외면’과 ‘야당 횡포’를 동시 겨냥하려는 일석이조의 포석이 담긴 셈이다. 하지만 이 대표 체포동의안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국민의힘이 과연 ‘민생’ 앞에서 그처럼 당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민생에 대해 면목이 없는 쪽은 국민의힘만이 아니다. 민주당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렇다. 평소에 버스를 타고 자주 지나다니는 어느 큰길가의 한 건물에는 민주당 측이 만든 이런 내용의 현수막도 걸렸다. “민주당이 해냈습니다. 따뜻한 민생 예산 확보.” 눈길을 확 끌어당길 만큼 명확한 예시도 없는 자화자찬이자 그야말로 다짜고짜 ‘민생타령’이다. 2023년도 예산이 국회에서 온갖 잡음 끝에 지연 처리된 데 대해서는 다수당으로서 아무 반성도 없는 그 태연함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민생 앞에서 여당도, 야당도 모두 이렇게 부끄러움이 없다.
지금이 어느 때보다 심각한 민생의 위기임을 모를 사람은 거의 없다. 고물가·고환율·고금리라는 3고(高)의 먹구름은 그대로이고, 여론조사마다 새해 한국의 경제가 더 나빠질 것이라고 답한 사람이 훨씬 많게 나타난다. 설 명절이 눈앞에 다가와 있어 서민들의 상차림 걱정도 당장 한가득이다. 인상된 공공요금에 시장 물가 또한 시름을 깊게 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금융위기 때보다 더한 경제 한파가 닥칠 수 있다는 경고를 다투어 내놓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 한술 더 떠 이번에는 안보마저 민생을 위협하며 흔들리고 있다. 북한의 도발이 새해 들어서도 멈추지 않고 있는 마당에 우리 영공이 북한의 무인기에 어이없이 뚫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심지어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했는데도 이를 뒤늦게야 인지했다는 발표까지 나와 불안감을 키웠다.
경제 위기가 우리 눈앞의 공기를 얼어붙게 하는 공포라면 안보 위기는 우리 뒷목을 서늘하게 하는 공포다. 모두 민생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요소이고, 이 둘을 다 방치하면 더 큰 위험 속으로 빠져들 것이 빤하다. 날씨도 춥고, 경제도 춥고, 안보도 추운 이 시기에 민생과 경제·안보가 어긋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민생 앞에서 보수·진보가 따로일 수도 없다.
외국의 심리학자들이 사회에서 배척당한 후 체감하는 온도를 조사하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한 그룹 참가자들은 과거에 거절당했거나 소외당했던 경험을 떠올렸고, 다른 그룹 참가자들은 사회에서 소속감을 느낀 경험을 떠올렸다. 그 결과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이 똑같았던 실내온도를 상대적으로 더 따뜻하다고 인식했다. 이를 민생에 빗대면, 우리 또한 사회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할수록 똑같은 추위도 달리 느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민생’이란 단어가 정쟁의 프레임에 갇힌 채 이미지로만 소비되어도 좋을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다. 그러니 부디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함부로 민생을 입에 올리지 말라. 민생을 말하기 앞서 ‘손에 잡히는 경제’를 향해 적극 나아가는 행동을 보이라. 그것이 지금 당장 여야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