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에서 간첩까지, 소설 같은 미수 인생 담다

정수일의 회고록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2023-01-08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만약 광복이 되지 않았다면 단재 신채호나 만해 한용운처럼 뜻을 굽히지 않았던 독립투사들은 이 시대에 어떻게 불릴까. 지독한 고집쟁이들 정도로 취급될 수 있다. 시대가 지나고, 명예는 회복됐고, 민족의 영웅이 됐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조만식, 홍명희 등 여전히 남북의 경계에 있는, 장기수라는 이름으로 살아서 남북에 나뉘어 있는 이들이다. ‘시대인’은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 같다. 한 시대를 가장 절절하게 살아왔지만, 아직은 그 끝을 맺지 못하고 회오의 감정을 교차하고 살아가는 이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정수일을 꼽는 데 이견을 다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미수(米壽)를 넘긴 정수일 교수의 회고록은 민족과 통일을 위한 일념을 담고 있다. 정수일은 1934년 함북 명천군에서 건너온 연일정씨들이 살던 간도의 명천촌에서 태어난다. 저자는 일제가 주도하던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해방 후 찾아온 공부의 기회에서는 한번 본 것을 그림처럼 기억하는 ‘재생적 환각’을 바탕으로 최고의 수재로 살아간다. 마침 제도적인 도움도 받으면서 베이징대 동방학부에 입학해 아랍어를 배우고, 카이로대학 유학을 하면서 외교 엘리트의 전형적인 코스를 밟는다. 하지만 천재적인 두뇌의 다음 여정은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었다.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정수일 지음│아르테 펴냄│604쪽│4만2000원
고심 끝에 그는 환국을 결정하고, 1963년 4월 북한으로 귀국한다. 중국에서 촉망받는 아랍어 전문가이자 학자였던 그는 북한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는데, 1974년 3월 남파 공작원이라는 운명을 부여받는다. 10년2개월 동안 10여 국가에서 신분세탁을 거친 후 필리핀 국적으로 한국에 들어와 ‘무함마드 깐수’라는 가명으로 살다가 체포돼 5년여의 감옥 생활을 거친 후 2000년 석방된다. 저자는 5장에서 영어의 생활에 대해서 담담하게 기술하고, 그 시간을 통해 인생 후반기를 설계했다고 밝힌다. 실제로 저자는 이 기간에 문명교류라는 이론과 실크로드라는 실천을 바탕으로 문명교류학을 정리한다. 출소 후에는 경제적으로, 신분적으로 곤란의 시간을 겪었다. 하지만 뜻있는 지식인들의 모임인 산악회를 통해 다시 사람들과 만나고, 감옥에서 번역한 《이븐 바투타 여행기》 등이 출간되면서 활동 폭을 넓혀가고 또 다른 인생의 재미를 느낀다. 미수를 넘어서 저술한 이번 회고록은 뛰어난 기억력을 바탕으로 자기 삶과 학문의 여정을 상세하게 기록한다. 하지만 이 책을 저술한 배경인 민족과 통일에 대한 집념이 무엇보다 반짝인다. 책을 통해 저자는 북한 환국이나 남파간첩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 등 그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을 밝히는 한편, 민족과 통일에 대한 절절한 염원을 담는 데 주력한다. 저자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편익이라는 논리로 통일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정이 식어가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배경에 1992년 일본장기신용은행에서 내놓은 통일비용이라는 망령이 있다면서 통일은 우리 민족이 미래를 개척할 유일한 길이라는 입장을 지킨다. 아울러 인류가 편견 없는 보편 문명을 통해 서로의 부정이 아닌 긍정, 상극이 아닌 상생 속에서 문명 간 부단한 상부상조적 교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직접 증명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