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하면 조리돌림…여성 아이돌은 왜 표적이 됐나
레드벨벳 조이 티셔츠 문구로 다시 불거진 ‘페미니스트 논란’
2020-08-29 하재근 문화 평론가
최근 레드벨벳 멤버 조이가 재킷 안에 입은 티셔츠 때문에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옷에 적힌 글씨가 문제였다. 알파벳 몇 개만 노출됐을 뿐이지만 누리꾼들은 이것이 ‘WE SHOULD ALL BE FEMINISTS’라는 문장이라고 유추해 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는 뜻으로, 서구권에선 이미 유명한 옷이다.
팝가수 리한나, 래퍼 에이셉 라키, 배우 샤를리즈 테론, 제니퍼 로렌스 등이 입은 바 있고 우리나라에선 김혜수, 현아 등이 입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이 호평한 옷이기도 하다. 조이가 이 옷을 입자 “너무 이기적이다” “여자 아이돌이 페미니스트 인증을 왜 하나”라는 내용의 비판이 쏟아졌다.
페미니즘 논란에 휘말린 젊은 여성 연예인은 이전에도 많았다. 2018년에 레드벨벳의 또 다른 멤버인 아이린이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히자 일부 팬이 ‘탈덕(더 이상 팬이길 거부함)’ 인증을 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아이린의 사진을 찢거나 불에 태우는 인증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기도 했다.
2018년에 에이핑크 멤버인 손나은이 ‘GIRLS CAN DO ANYTHING’(여성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문구가 적힌 휴대폰 케이스를 들고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가 비난당한 사건도 있었다. 이런 흐름이 아직 이어져 2020년에 티셔츠 문구 때문에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연예인에게로
이는 페미니즘 물결에 대한 반감이 젊은 여성 연예인에게 집중돼서 나타난 현상이다. 샤를리즈 테론이나 제니퍼 로렌스, 리한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연예인으로 한국 포털에서도 이들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출연한 영화가 개봉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페미니즘 옷을 입었다고 비난하는 댓글은 달리지 않는다. 외국인의 패션에 대해선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 연예인이 입은 옷은 한국 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남의 일이 아닌 우리 일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한국인 중에서도 유독 젊은 여성 연예인에게 공격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게 특이하다. 사회적 영향력으로 따지면 김혜수도 젊은 아이돌 못지않은데 말이다. 주로 우리나라 20대 초중반 여성 연예인들이 표적이다. 이들이 부적절한 언행을 하지 않는지에 대해 많은 누리꾼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분위기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20대 초중반 젊은 여성 연예인일 경우 사회적 매장이라도 할 듯이 질타를 가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까지 겹쳐, 페미니즘과 연관된 여성 연예인이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기적이라는 논리까지 생겨났다. 페미니즘과 연관되면 공격당할 것이 뻔한데 굳이 페미니즘 인증을 해서 자기 팀까지 힘들게 한다는 주장이다. 말도 안 되는 논리고 부당한 공격이다. 페미니즘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이나 옷을 착용했다고 해서 페미니즘 인증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나, 베스트셀러인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게 죄라는 주장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런 명목으로 비난하는 것 자체가 부당한 것인데, 그런 부당한 공격을 기정사실화하면서 그 공격을 자초했으니 이기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혀 비판당해도 마땅하다는 논리다. 이런 어이없는 논리까지 등장할 정도로 젊은 여성 연예인을 향한 날 선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다.칼끝 위에서 활동하는 젊은 여성 연예인
인터넷에서 젊은 여성 연예인이 과도하게 공격당하는 현상은 과거부터 존재해 왔다. 한 20대 여배우가 ‘할인카드를 쓸 때 남자의 매력이 떨어져 보인다’고 했다가 이후 대단히 오랜 세월 동안 악플에 시달린 사건이 있었다. 실언이긴 했지만 심각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젊은 여성이 남성의 경제력을 모욕한 죄로 인터넷 여론재판에서 극형을 받은 셈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여성 대학생이 ‘키 작은 남성은 루저처럼 느껴진다’고 했다가 사회의 공적으로 찍혀 엄청난 공격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 누리꾼들은 그 학생이 다니는 학교로 전화까지 하며 압박을 가했다. 이 경우도 조금 부적절한 발언 정도였는데 누리꾼들은 남성의 키를 품평한 젊은 여성을 대역죄인 취급했다. 페미니즘 관련 논란도 이런 ‘감히 여자가!’라는 공격의 연장선상에 있다. 젊은 여성 연예인은 귀엽고, 밝고, 섹시하고, 백치 같은 모습으로 남성들이 바라는 즐거움을 고분고분 선사해 줘야 하는데 감히 비판적 사회의식에 눈뜨고 남성 기득권을 공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죄다. 이러면 불온하다. 젊은 여성의 행동거지 자체가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다. 영화 개봉 때 배우들이 극장을 돌며 무대인사를 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다. 이런저런 극장을 짧은 시간에 돌다 보면 늦을 수도 있고, 바쁜 스케줄 속에서 피곤한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행사 시간 내내 반듯한 자세를 유지할 순 없기에 잠시 짝다리를 짚는 등 흐트러진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용납되지 않았다. 설리가 무대인사에 조금 늦거나 피곤한 모습을 보이거나, 짝다리를 잠시 짚으면 바로 태도 논란이 터졌다. 이런 사건들이 보여주듯 한국에서 젊은 여성 연예인들은 거의 칼끝 위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람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젊은 여성 연예인들의 태도를 심판한다. 원래 인터넷에선 젊은 여성을 품평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마음에 들면 여신이라며 치켜세웠다가 심사가 뒤틀리면 바로 패륜 죄인으로 몰아 조리돌림을 시작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젊은 여성 연예인, 그중에서도 특히 아이돌이 품평의 대표주자가 된 것이다. 남성 누리꾼들이 젊은 여성을 화제에 올리며 품평하는 행위 그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고, 사회적 무력감과 박탈감을 인터넷에서 젊은 여성 연예인을 징치하는 행위로 보상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여신으로 떠받들어주고 돈까지 많이 벌게 해 주니 그런 불편 정도는 감수하는 것이 프로 정신이라고 일각에선 강변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물어뜯을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여긴다. 일반적 젊은 여성들에게 경계심을 갖게 할 본보기로 연예인을 활용하기도 한다. 여기에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까지 가세했다. 그런 환경이니 젊은 여성 연예인들이 칼끝 위에 선 것처럼 위태롭게 활동해야 하는 것이다. 태도 논란 한 번으로 순식간에 낙인이 찍힌다. 정서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