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번째 부동산 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
‘투기와의 전쟁’이라는 딜레마…무엇이 투기인가 ‘핀셋 정책’으론 ‘빚내서 집 사자’ 흐름 못 바꿔
2020-06-23 김종일 기자
투기와 투자는 어떻게 구별되나
문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며 향후 부동산 대책과 관련해 몇 가지 원칙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일부 지역은 서민들이 납득하기 어렵고 위화감을 느낄 만큼 급격히 상승한 곳이 있는데 이런 지역들은 가격이 (취임 당시 수준으로) 원상회복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일부 지역의 집값 상승세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판단이다. 또 문 대통령은 “정부가 대책을 내놓으면 상당 기간 효과가 있다가도 다시 우회하는 투기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 투기자본의 생리”라며 “지금의 대책 내용이 시효를 다했다고 판단되면 더욱 강력한 대책을 끝없이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기심리를 잠재우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대통령의 말은 절반만 맞았다. 투기자본은 정부 대책을 우회하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냈다. 정부 대책을 회피한 ‘풍선 효과’는 전국적으로 나타났다. ‘마용성(마포·용산·성동)’에 이어 ‘노도강(노원·도봉·강북)’ ‘수용성(수원·용인·성남)’ ‘화구광(화성·구리·광명)’ 등 지역을 옮겨가며 집값은 계속 들썩거렸다. 정부는 두더지 게임을 하듯 풍선 효과를 잡기 위한 대책을 뒤늦게 냈지만, 투기자본은 곧 정부 규제가 허술한 곳을 찾아 이동하며 집값 상승을 이끌었다. 현 정부의 부동산 철학은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곳’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공공임대주택 확충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공급 확대 정책도 국민들이 원하는 서울보다는 신도시 등에 집중됐다. 재건축·재개발에 대한 수요도 억눌렀다. 투기 수요는 묶고 1주택 실거주자를 위한 지원은 늘리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투기 수요’와 ‘투자 수요’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분명 투기 수요는 존재한다. 언론 보도처럼 물건도 보지 않고 갭투자 계약금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대한민국 부동산 전체를 움직일 수는 없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수억원의 빚을 낸다면 그것은 투기일까 투자일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정부는 집은 사는(live)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국민들은 집을 사서(buy) 살고(live) 싶어 한다.국민 10명 중 8명은 “내 집 마련 꼭 필요”
최근 국토부가 발표한 ‘2019년 주거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84.1%는 “내 집을 꼭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06년 주거실태조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높은 비율이다. 연령대로 보면 주택 보유의 필요성을 느끼는 신혼부부가 크게 증가했다. 재작년만 해도 83.8%였던 비중이 87.8%까지 올랐다. 1년 만에 이 비중이 이렇게 증가한 세대는 없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왜 이들은 ‘사는(buy) 집’을 원할까. 노동소득 증가율에 비해 부동산과 같은 자산가격 상승률이 워낙 가파르니 무리해서라도 ‘막차’를 타려는 것은 아닐까. 실제 우리 국민들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거 지원 프로그램은 ‘주택구입자금 대출지원(31.2%)’인 것으로 조사됐다. 전세자금 대출지원(23.5%)과 월세 지원(11.1%)까지 합치면 국민 10명 중 6명 이상이 주거와 관련한 정부 역할로 대출 등 자금지원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 부동산의 성격은 매우 이중적이다. 의식주의 한 축으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면서 동시에 부(富)의 핵심 증식 수단으로 인식된다. 국민 절반인 2600만 명이 청약통장에 가입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 집이 없을 때는 집값 안정이 최우선이지만, 내 집이 생긴 순간부터 그 마음은 180도 바뀌게 된다. 2014년 이후 ‘내 집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내 집이 있어야 부를 증식시킬 수 있다’로 급속도로 바뀌며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빚내서 집 사라’는 말로 요약되는 박근혜 정부의 7·24 대책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집값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올랐다. LTV(주택담보인정비율) 50%를 70%로 완화해 주자 2013년 9조원에 불과했던 주택담보대출이 2014년 36조원으로 4배나 폭증했다. 내 집 마련이라는 욕망을 완화된 LTV가 채워준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잔뜩 빚을 내 산 집값이 올랐으면 하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여력이 있든 없든 ‘영혼까지 대출을 끌어모아’ 집을 사는 게 ‘상식’처럼 됐다. 그리고 그 상식은 집값을 욕망의 바벨탑처럼 끌어올렸다.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청년가구는 내 집 마련의 가장 큰 이유(8.5%) 중 하나를 ‘자산 증식 수단’으로 꼽았다. 전 세대를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였다. 문제는 현 정부 역시 이런 기조에 한몫했다는 데 있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2017년 이후에도 주택시장은 계속 과열됐다. 일반적으로 현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대책은 규제 일변도에 강도도 초강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과열된 시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쓴 거의 대부분의 정책은 ‘핀셋 규제’였다. 그간 발표된 20번의 부동산 대책은 대출 규제의 대상과 강도를 조금씩 높여온 것과 다르지 않다. ‘6·17 대책’ 전까지 사실상 현 정부의 정책은 그물코가 촘촘하지 않았다. 채상욱 하나금융투자 연구위원은 “박근혜 정부가 완화 정책은 전국적으로 썼는데, 규제는 핀셋으로 한다면 이는 여전히 ‘완화 기조’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는 왜 그랬을까. 부동산 이슈는 정치적 인화성이 강해 정권을 언제든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 민주당의 한 현역 의원은 “결과적으로 타이밍에서 실기했다”며 “참여정부 트라우마가 제대로 된 정책을 제때 쓰는 데 주저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그사이 서울 아파트 중위 가격은 2017년 말 6억8500만원에서 2020년 5월 9억2013만원으로 2억원 넘게 올랐다(‘부동산114’가 서울 아파트 124만여 가구 시세를 집계). 같은 기간 서울 내 6억원 이하 아파트 가구 수 비율은 조사 대상의 57.5%(71만3573가구)에 달했지만, 올 5월에는 30.6%(38만2643가구)로 줄었다. 6억원은 서민·중산층 등 실수요자가 집을 살 때 많이 이용하는 ‘보금자리론(최대 LTV 70%·3억원까지 대출)’의 기준 금액이다. 고가·초고가 집값은 잡았지만 중저가 주택가격은 되레 크게 올라 정작 실거주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