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 강타한 ‘부캐의 세계’
본캐 능가하는 부캐, 새로운 가능성 엿볼 수 있는 신세계
2020-05-30 정덕현 문화 평론가
‘부캐’라는 말을 아는가. ‘부캐의 세계’는 어떤가.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손에 들고 던지는 ‘부케’가 아니다. 부(副)캐릭터의 준말로 이제는 하나의 현상을 지칭한다. ‘부캐의 세계’라는 말이 나온 건 MBC 《놀면 뭐하니》에서다. 유재석이 드럼에 도전하고, 트로트 신인가수가 돼 앨범을 낸 것도 모자라 라면집을 운영하고 예술의전당에서 하프 협연을 하면서 무한 확장해 온 ‘부캐’를 모아 특집으로 꾸민 것이 바로 ‘부캐의 세계’ 편이었다. 《놀면 뭐하니》는 마침 화제가 됐던 드라마 JTBC 《부부의 세계》를 패러디해 이처럼 재치 있는 부제를 달았다.
‘부캐의 세계’는 《놀면 뭐하니》의 유재석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양한 연예인들은 부캐라는 이름으로 색다른 캐릭터 활동을 펼쳤다. 둘째 이모 김다비라는 부캐로 ‘주라주라’라는 트로트 가수 활동을 하는 김신영과 MBC 《나 혼자 산다》에서 우연히 ‘조지나’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킨 박나래가 대표적이다. 유명 가수의 무대나 노래를 패러디하거나 개사해 부르며 카피추(카피하는 추대엽)라는 부캐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추대엽도 부캐의 대표 선수 중 한 명이다.
김다비는 최근 《놀면 뭐하니》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김다비는 《놀면 뭐하니》가 시도했던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100마리 치킨을 무료로 나눠주는 이른바 ‘토토닭(토요일 토요일은 닭)’ 이벤트에 참여했는데, 치킨을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깜짝 무대를 선보였다.
또 카피추는 유병재와 함께 했던 《창조의 밤》 같은 유튜브 콘텐츠가 화제가 되면서 점점 그 독특한 캐릭터가 입소문을 탔다. 최근에는 MBC 《전지적 참견 시점》이나 《라디오스타》는 물론이고 SBS 《본격연예 한밤》에도 출연하는 등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이들은 누가 봐도 그 인물이 유재석이고, 김신영, 박나래, 추대엽이지만 극구 아니라고 부인하며 부캐 활동을 한다. 예를 들어 김다비는 ‘둘째 이모’ 캐릭터로 설정된 나이가 77세다. 그래서 만나는 이들에게 대부분 반말을 하고 인생에서 묻어나는 포스 가득한 멘트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 어찌 보면 본캐(본캐릭터)가 가진 이미지의 한계를 부캐를 통해서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누가 봐도 가상이다. 하지만 대중은 이 부캐 현상을 선선히 받아들이고 있다.
캐릭터 진화의 또 다른 세계
최근 펭수 열풍은 신드롬이라 부를 만했다. 특이했던 건 누가 그 캐릭터의 실제 주인공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을 때 팬들 스스로 나서서 그 비밀을 ‘지켜주려’ 했다는 점이다. 팬들은 펭수라는 캐릭터가 실제 주인공보다 더 소중했다. 이에 굳이 실제 주인공을 드러내는 일이 캐릭터를 마치 파괴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이는 최근 들어 생겨나고 있는 가상 캐릭터에 대한 대중의 달라진 인식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제 대중은 캐릭터가 가상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게 된 것은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일상을 이제는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사이버 세계에서 저마다 갖는 닉네임과 아바타 같은 ‘부캐’의 요소들을 우리는 꽤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경험해 왔다. 여기에 게임을 할 때 세우는 저마다의 가상 캐릭터는 다른 관점으로 보면 누구나 쉽게 ‘부캐’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것은 실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짜라 치부할 수 없는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됐다. 대중문화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몰입’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서든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다. 과거 드라마에서 뒷목 잡는 악역을 한 배우가 실제로 욕을 먹기도 한 시절이 있었다. 캐릭터와 실제 인물을 혼동하던 시절이다. 그만큼 당대에는 한 인물이 여러 캐릭터를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캐릭터와 실제 인물을 분리해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겼다. 누구나 몰입해 그 캐릭터로서 사이버 세계에서 활동하지만 빠져나오면 바로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게 익숙해져서다. 그래서 이제 잘한 악역은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 마치 JTBC 《부부의 세계》에서 뻔뻔하고 찌질한 남편 역할을 실감 나게 연기해 호평받은 박해준처럼 말이다.연기자들도 실제 자신 아닌 캐릭터로 SNS 활동
최근 들어 달라진 캐릭터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 변화는 색다른 풍경들도 만들어내고 있다. 연기자들이 이제는 자신이 하는 작품의 캐릭터를 내세워 SNS 활동을 하는 것이다. 배우 유아인은 6월에 개봉하는 영화 《#살아있다》에서 그가 연기하는 극 중 인물 오준우의 이름으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생존자 있으면 DM주세요’라고 적힌 이 계정은 물론 영화 홍보의 장이긴 하지만, 일종의 오준우라는 캐릭터를 통한 대중들과의 놀이가 가능해진 공간이 됐다. SNS에 캐릭터를 활용한 홍보로 일찍이 화제가 됐던 것은 지난해 9월 종영한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아이유가 연기했던 호텔 사장 장만월의 계정이다. 아이유가 직접 운영했던 이 계정은 촬영 현장 사진과 장만월 특유의 말투가 담긴 코멘트들을 올려 드라마 바깥에서도 드라마를 계속 즐길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다. 연기자들의 캐릭터를 통한 SNS 활동은 작품 홍보와 더불어 연기자를 위한 팬 사이트로도 활용된다. 종영한 드라마 SBS 《하이에나》에서 김혜수가 연기한 정금자 캐릭터가 그 단적인 사례다. 드라마 속 캐릭터 설정이었던 ‘법률사무소 충 대표변호사’로 이력을 적고 극 중 인물의 목소리를 냈던 정금자 계정의 SNS는 드라마가 끝난 후 아이디와 프로필을 김혜수로 바꿔 운영하고 있다. ‘부캐의 세계’ 이전에는 ‘멀티 플레이어’의 시대가 있었다. 즉 연기자가 예능에 출연하고, 가수가 연기를 하는 식의 시대가 그것이다. 멀티 플레이어의 시대에 다양한 캐릭터의 활동은 ‘부업’의 의미가 더 컸다. 하지만 ‘부캐의 세계’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캐릭터의 활동은 취미와 취향, 놀이의 의미가 더 크다. 그리고 그 부캐가 하는 가상의 놀이가 오히려 주업으로 바뀌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도 아직 들여다보지 않은 부캐의 가능성을 찾아보게 하고 있다. 퇴근 후 또 다른 부캐의 가면을 쓰고 일 바깥에서 또 다른 나를 찾으려는 이가 늘어나고 있는 건 그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