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권력의 시녀’에서 ‘무소불위 권력’으로

[검찰 70년 영욕의 역사] 정권(政權)은 바뀌어도 검권(檢權)은 그대로

2020-01-21     공성윤 기자
‘정권(政權)은 바뀌지만 검권(檢權)은 영원하다.’ 대한민국 검찰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왔다. ‘권력의 시녀’로 불리며 정권 지키기에 앞장섰는가 하면, 정권을 겨냥한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다만 정치권력이 매번 부침을 겪은 데 반해 검찰권력은 항상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그런 검찰이 기로에 섰다. 현 정권은 ‘검찰 개혁’을 앞세워 검권의 ‘힘 빼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정권과 검찰의 70년 영욕사를 살펴봤다. 현대 검찰제도는 프랑스에서 기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비교형사법학회에 따르면 13세기 프랑스에서 왕은 자신의 대리인(procureur du Roi)을 뽑았다. 이들은 법원에서 주권(왕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리인이란 뜻의 프랑스어 ‘procureur’가 검사란 뜻도 갖게 된 배경은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가 태동하면서 왕권은 사라지고 주권은 국민에게 옮겨갔다. 국민 이익을 위해 검사는 형사소송을 맡게 됐고, 국민 이익을 위해 대통령과 정부는 행정업무를 맡게 됐다. 어디까지나 공익을 함께 책임져야 할 이들이 한국에서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는 검찰 개혁이란 거대 담론이 어디까지나 주권(국민)을 보장하는 선에서 이뤄져야 함을 보여준다. 나아가 검찰 개혁의 방향을 국민이 끊임없이 감시해야 할 필요성도 제시한다.  검찰이 처음부터 개혁의 대상이었던 건 아니다. 지금은 검찰을 가리켜 ‘무소불위의 권력’이라고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경찰이 그 주체였다. 당시 경찰은 독립수사권을 휘두르며 식민지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12년 형법을 대신했던 조선형사령은 경찰에 압수, 수색, 피의자 구인 등을 검사 통제 없이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해방 이후 상황은 바뀌었다. 법무부는 연구보고서를 통해 “일제강점기 탄압 도구로 남용돼 온 경찰권에 대해 견제장치가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했다. 이후 1948년 검찰청법이 만들어졌다. 수사와 공소 제기, 법원에 대한 법령의 적용 청구, 재판의 지휘·감독 등에 대한 사항을 규정했다. 이는 오늘날 검찰 권한의 기틀이 됐다.  검경 수사권을 둘러싼 논란도 이때의 검찰청법에서 비롯됐다. 해당 법에서 “경찰은 범죄수사에 있어 소관검사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고 규정, 검사에게 수사지휘권을 넘긴 것이다. 이후 수차례 법령이 제정되고 개정되면서 검사의 권한은 커져 갔다. 1954년 만들어진 형사소송법은 기소 독점권을, 1962년 5차 개정 헌법은 영장 청구권을 부여했다. 
ⓒ 시사저널 포토·연합뉴스

권력의 중심, 警에서 檢으로 

정권은 이러한 검찰권을 이용하려 했다. 1963년 취임한 신직수 검찰총장은 이른바 ‘정치검찰’ 시대를 연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공안조작 사건인 인민혁명당 사건의 수사를 지휘했다. 인혁당 사건의 기소를 두고 1964년 동아일보는 “정치가 검찰을 시녀로 이용해 왔다”고 비판했다. 이후 군사정권 내내 정치검찰이란 조롱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노태우 정부 말기에 취임한 이정우 법무장관은 “검찰이 정권 유지 도구란 비판을 받아온 사실을 잘 안다”고 인정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다. 김대중 대통령은 법무부 첫 업무보고에서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고 했다. 그러면서 “권력을 위해 검찰권을 행사해 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말은 대통령 직속기구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의 출범으로 구체화됐고, 검찰 개혁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다 1999년 터진 ‘대전 법조비리 사건’은 검찰의 자정능력에 의문을 품게 했다. 당시 검찰 수뇌부의 사퇴를 요구한 심재륜 대구고검장은 “검찰 사상 최악의 위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혁 움직임은 흐지부지됐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의 편향적 위원 구성과 폐쇄적 운영, 입법부와 사법부의 미비한 협력 등이 실패 원인으로 지목됐다. 게다가 김대중 대통령마저 임기 말에 세 아들이 모두 비리에 연루되면서 곤욕을 치렀다. 결국 검찰의 존재감만 키운 꼴이 되고 말았다. 
ⓒ 시사저널 포토·연합뉴스

개혁 대상 된 檢, 정권을 치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검찰 개혁을 강조했다. 2003년 취임 후 비검사 출신의 강금실 법무부 장관을 임명했다. 이어 기수와 서열 관행을 깨는 검찰 인사를 단행했다. 그해 3월 검찰 개혁을 화두로 열린 ‘검사와의 대화’에서 대통령과 검사들은 충돌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목불인견이었다. 젊은 검사들은 끊임없이 인사 문제만 되풀이해 따지고 들었다. (중략) 정작 하고 싶었던 검찰 개혁 논의는 아예 못 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개혁 드라이브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정부는 형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공판중심주의를 채택했다. 이때부터 검찰 조서는 피고인 동의가 없으면 증거로 채택할 수 없게 됐다. 또 국민참여재판 제도를 도입해 기소에 대한 판단권을 국민에게 넘겼다. 대신 개별 사건에 대해선 청와대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과의 핫라인을 끊어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공수처 설치는 끝내 무산됐다. 검경 수사권 조정도 없던 일이 됐다. 개혁의 대상이 된 검찰은 청와대에 칼을 겨눴다. 불법 대선자금 수수 의혹에 대한 수사는 노무현 대통령 임기 내내 발목을 잡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저서 《운명이다》에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보수정권에서는 검찰 개혁 의지가 꺾였다는 견해가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은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긴 했다. 2010년에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통해 경찰의 수사개시권을 명문화했다. 반면 검사의 수사지휘권도 강화해 양쪽의 반발만 불렀다.   박근혜 대통령도 검찰 개혁을 대선 공약으로 뽑으며 19개 약속을 내걸었다. 이 가운데 지켜진 건 3개에 그쳤다고 경실련은 평가했다. 대검 중수부 폐지 공약은 이행됐으나 반부패수사부로 부활해 무의미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되레 검찰의 정치화를 다시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청와대가 검사를 편법으로 파견 받는 방법을 통해서다. 검사의 청와대 파견은 상호 간 공생관계를 형성한다는 이유로 검찰청법에서 금지하고 있다. 이를 피해 ‘검사 사직-청와대 근무-검찰 복귀’와 같은 꼼수가 악용됐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이러한 방법으로 청와대와 검찰의 연결고리를 맡은 검사는 이명박 정부에서 총 22명으로 조사됐다. 노무현 정부(8명)의 2배가 넘는다. 하태훈 고려대 로스쿨 교수(참여연대 공동대표)는 2013년 보고서를 통해 “이명박 정부 들어 (검찰을) 정치수단으로 활용하려는 통치술로 검찰권력이 극대화됐다”고 평가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 출신 인사들을 두루 기용했다. 법무연수원장을 지낸 정홍원 전 총리를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했고, 유신 시절 공안수사를 이끈 김기춘 전 검찰총장을 비서실장으로 뒀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청와대에 검찰이란 칼자루를 쥐여줬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그 외에 헌법재판소장과 법무부 장관도 검찰의 공안 라인이 맡았다. 박근혜 정부에서 마지막 총리를 역임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도 공안 검사 출신이다.   

검찰 개혁 핵심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

“검찰 권력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검찰 개혁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개혁 속도는 집권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공수처 설치법안이 통과됐고, 올해 들어서는 검경 수사권 조정법안이 통과됐다. 이로써 노무현 대통령의 숙업이었던 과제 두 개가 해결됐다.  문 대통령은 검찰 개혁을 “국민이 염원하는 역사적 숙명”이라고 표현했다. 정작 여론은 갈린다. 청와대가 감찰 무마와 선거 개입 의혹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의 측근을 잘라내는 인사를 단행했다. 한국당은 이를 ‘숙청’이라고 표현했다.  검찰 개혁의 핵심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으로 꼽힌다. 이는 문 대통령이 누누이 밝힌 바 있다. 현행법도 이를 뒷받침한다. 검찰청법 4조는 “검사는 직무를 수행할 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의무를 진 두 권력기관이 서로 으르렁대고 있다. 이 와중에 궁극적 목표인 국민 이익은 어디에 있냐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