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사랑의 매, 폭행죄 될까?
[남기엽 변호사의 뜻밖의 유죄, 상식 밖의 무죄] 8회 - 사랑의 매, 영락없이 폭행죄가 된다
2019-05-08 남기엽 변호사
교내 체벌은 현행법상 불법인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2011년 3월 초중등교육법시행령으로 교내 체벌은 일절 허용되지 않지만 체벌 문제는 아직도 뜨거운 이슈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수업 도중에 떠든다는 이유로 꾸지람을 들은 한 학생이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교사는 망설였다. 신체적 통제를 가할 수 없는 현행법상 교사가 나가는 학생을 제어할 방법은 없기 때문. 그래도 이것마저 막지 못한다면 사도헌장(師道憲章)이 다 무어란 말인가. 따라 나간 교사는 학생을 말렸다가 그만 밀침 당하는 봉변을 당했다. “꼴에 선생이라고”라는 말은 비수가 되어 꽂혔고 해당 교사는 직(職)을 관두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교사인권조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부터 학생 부모의 몰상식에 대한 비난까지 분노가 쏟아졌다. 사랑의 매,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일까. 이에 관하여 헌법재판소는 2006년 학교 체벌이 정당화될 수 있는 4가지 근거를 제시한 바 있다.
①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에만 행하여질 것, ② 학생에게 체벌의 목적을 알리고 절차를 준수할 것, ③ 상해 발생이 적은 부위를 택하는 등 체벌의 방법이 적정할 것, ④ 학생이 수인할 수 있는 정도여야 할 것.
교사가 학생의 뺨을 1대 때린 사건에서 어느 재판관은 “만일 이 정도의 체벌행위가 폭행죄라면 선생님들은 고소당하거나 처벌되지 않을까 하는 찜찜한 생각에 나약과 무책임 속으로 도피하게 된다”는 의견을 밝히기까지 했다.
유교문화권에서 체벌은 언제나 미화됐다. 명심보감 훈자편의 ‘사랑하는 아이에겐 매를 들고(憐兒多與俸) 미운 아이에겐 떡을 준다(憎兒多與食)’는 말이 대표적이다. 서양이라고 형편이 다르지 않다. 앨리스 밀러의 저작‘사랑의 매는 없다’는 남아 폭력의 대물림이 가져온 서양의 교육문화와 이에 침묵하는 학계를 폭로한다.
사실 군대 정도가 아니면 어딘가에서 일방적인 폭력을, 그것도 공개적으로 수인(受忍)해야 하는 경우는 없다. 재벌조차 물컵 하나 던진 것으로 압수수색과 대중의 융단폭격을 감내해야 하는 시대에 굳이 교내에 체벌이 훈육수단으로 남아야 할까.
체벌은 학생을 교육대상이 아닌 통제수단으로 바라볼 때 가능해진다. 이러한 관점이 여실히 투사된 것이 전술한 헌법재판소의 입장이다. 그 입장에 따르면 교사는 ① 교육상 폭행이 불가피한 경우가 발생한 경우, ② 학생에게 체벌의 목적을 친절하게 설명한 뒤에, ③ 상해 발생이 적은 부위를 임상학적으로 판단하여, ④ 학생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마음을 읽어 때리라는 말인데 이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앨리스 밀러에 따르면, 어릴 때 받은 모욕과 수시로 당했던 체벌은 내재되어 성인이 된 뒤 파괴적 인격장애와 마음의 병을 겪게 만든다. 어릴수록 자신을 이해해주는 단 한 명의 누군가가 필요하다. 아버지에게 억압당했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겐 있었지만 히틀러나 스탈린에겐 없었던 것이 바로 그 ‘누군가’이다. 집에서도 버림받은 아이들에게“넌 좋은 아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교사의 몫이다.
2006년 헌법재판소 이전의 법원 시각은 더욱 아찔하다. 대법원은 과거 전치 6주 이상의 상처를 입혔을 경우에야 체벌이 아닌 폭력으로 판단했다. 얼마 전 직원을 폭행해 논란에 휩싸인 한 웹하드 업체의 회장도 전치 3주의 상처를 입혔음을 감안하면, 2011년 시행된 체벌 금지 시행령은 행정부가 사법부의 편벽을 계행한 선례라 할만하다.
때리지 못하면 학생 통제는 어찌 할까. 자유엔 책임이 따르므로 확장된 학생인권조례에서의 자유에 걸맞은 책임을 부과할 것이다. 재산범죄 등에 소년법을 적용하여 좀 더 기회를 주는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청소년 역시 폭행, 성폭력의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는 이상 합당한 제재를 했으면 좋겠다. 교육당국의 체제우월성에 익숙한 우리에겐 낯선 도립(倒立)이지만 그 길만이 적어도 사랑(?)의 매에 대한 향수는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사랑의 매, 영락없이 폭행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