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데리고 괌으로 피신” 미세먼지가 불러온 ‘맘부격차’

‘맘 카페’에 ‘미세먼지 도피 해외여행’ 글들 공유…“나라 아닌 돈이 내 아이 지켜”

2019-03-05     박성의 기자
“오늘 미세먼지 농도 최악. 아기랑 괌에서 한 달 살다 오려고요.”  서울에 초미세먼지 경보가 내려진 지난 1월15일. 서울 한 지역구의 ‘맘 카페’(해당 지역구의 엄마들이 모인 인터넷 공간)에 이 같은 글이 올라왔다. 돌이 갓 지난 딸아이를 두고 있다고 밝힌 작성자는 “아기에게 미세먼지는 독약. 우리 막둥이 몸 지킬 겸 출국!”이라고 일상을 전했다. 해당 글은 올라온 지 하루 만에 댓글 십여 개가 달렸다. 댓글 대부분이 괌 체류비용이나 방법 등을 묻는 문의 글. 그러나 같은 글을 읽은 또 다른 엄마 송아무개씨는 ‘정말 부럽네요ㅠㅠ’라는 댓글만을 남긴 채 로그아웃했다. 아이의 돌잔치도 생략한 형편에, 어림잡아 수백만원이 드는 ‘미세먼지 탈출기’를 공감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연일 기승을 부리는 미세먼지가 엄마들의 일상까지 바꿔놓고 있다. 수입산 미세먼지 측정기를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가 육아 필수품으로 부상한 가운데, 아이를 위해 ‘미세먼지 청정국’으로 출국했다는 체험담이 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연일 공유되고 있다. 과거 ‘영어 유치원’이나 ‘영어 발레’ 등이 부모 부(富)의 가늠자 역할을 했다면, 최근에는 미세먼지로부터 아이를 어떻게 지켜내느냐가 이른바 ‘맘부격차’(Mom+빈부격차)의 지표가 되고 있는 셈이다.
ⓒ 일러스트 오상민

500만원이면 한 달은 ‘미세먼지 프리’

서울 송파구에 2년 전 이사 온 김혜미씨(가명·31). 김씨는 결혼과 동시에 시댁의 도움을 얻어 서울 한 신축 아파트에 전셋집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딸아이를 출산한 김씨는 지역 내 엄마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인 ‘맘 카페’에 가입했다. 이른바 ‘선배 엄마’들로부터 육아 노하우를 전수받겠다는 생각이 컸고, 실제 김씨는 모유 수유 방법부터 옷, 키즈카페, 유치원 등 각종 육아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지역 엄마들이 추천하는 모든 육아법을 그대로 실천하던 김씨지만, 최근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엄마들이 공유한 ‘미세먼지로부터 아이를 지켜내는 방법’을 따라가는 게 김씨에게 큰 숙제가 됐다. 외출을 삼가고, 유아용 마스크를 구매하고, 집에 공기청정기를 설치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김씨는 ‘아이를 지키려면 나라도 믿으면 안 된다’는 엄마들의 성화에 23만원을 주고 미세먼지 측정기를 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 안팎의 미세먼지 농도를 직접 쟀다. 이 밖에 40만원 상당의 수입산 차량용 공기청정기도 설치했다. 외벌이 형편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맘 카페 회원들의 조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세먼지가 계속 극성을 부리자 엄마들 사이에 ‘해외에서 살다 오기’나 ‘이민’이 대안책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실제 해당 카페에는 ‘아이와 괌 or 캐나다에서 살다 오기’ 등의 글이 공유되고 있다. 올라온 한 게시글에 따르면 이들 국가에서 2인 가족 기준 1개월간 체류하는 데 약 4000~5000달러(약 450만~560만원)가 소요된다. 댓글로는 한국인 부모를 대상으로 ‘미세먼지 탈출’ 관광상품을 파는 여행사 연락처 등도 공유된다. 이를 일부 ‘극성맞은’ 엄마들만의 관심사라고 보기도 어렵다. 김씨가 가입한 카페에만 이민 및 해외 출국 관련 글이 3000건 이상 게시됐으며, 같은 기간 ‘영어 유치원’(약 200건)을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보다 10배 이상 많다. 엄마들 사이에 가장 뜨거운 육아 키워드로 ‘한국 탈출’이 부상한 셈인데, 이를 바라보는 엄마들의 시각은 처한 현실에 따라 갈린다. 실제 초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린 지난 1월부터 이달까지 괌에서 체류하고 있다는 전가은씨(가명·30)는 “한국에 있을 때는 아이가 감기를 달고 살았다. 공기청정기를 24시간 틀어놔도 가래 소리가 ‘그렁그렁’했는데, 여기(괌) 온 지 하루 만에 그런 증상이 없어졌다”며 “정부가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데 이런 생활을 하는 게 사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빚이라도 내고 싶은 게 엄마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시흥에서 3살 난 아들을 키우고 있다는 남미진씨(가명·30)는 “SNS를 보면 아이와 함께 섬나라로 가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공유하는 엄마들이 많다”며 “아이를 낳기 전이라면 허세라고 무시했을 수 있다. 당장 남편이랑 국내여행 가기도 빠듯한 형편에 그런 사진을 보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할 수는 없으니까”라고 했다. 이어 남씨는 “그런데 요즘 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면 ‘무리해서라도 외국으로 나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 유난스러워야 아이를 지킬 수 있는 현실이 조금 서글픈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엄마들에게 신뢰 심어줘야”

국내 여행업계는 한국의 여행 트렌드가 중국을 따라가게 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일찌감치 중국에서는 ‘폐 세척 관광’이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국 내 대기오염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남중국해 하이난(海南岛)섬의 싼야(三亞)와 티베트의 라싸, 동중국해의 저우산(舟山) 군도 등 공기가 맑은 지역이 중국인들의 선호 여행지로 부상했다. 하나투어는 지난해 12월 ‘2019년 해외여행 트렌드 전망’을 발표하면서, 브루나이와 핀란드 등 일명 ‘미세먼지 ZERO 청정 국가들’이 올해 각광받는 여행지가 될 것이라 밝힌 바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소비 기조를 단순한 ‘트렌드 변화’로 분석하기에는 얽힌 문제들이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부모의 재력과 미세먼지를 회피할 수 있는 기회가 비례한다면, ‘아이들의 건강 양극화’에 대한 우려가 사회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세먼지로부터 아이를 지키고픈 부모의 심리는 욕망이 아닌 본능이다. (해외여행이나 이민 등을) 상식 밖의 지나친 욕심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며 “문제는 돈에 따라 미세먼지를 회피할 수 있는 기회나 능력이 갈리다 보니 일부 엄마들이 상대적인 무기력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정부가 엄마들을 달랠 수 있는 강한 대책을 내놔야 한다. 미세먼지는 국민의 건강권과 직결되는 문제로, 부모들에게 나라가 내 아이를 지켜줄 수 없다는 불안감을 조성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