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되는 멜로, 뜬금없는 멜로, 욕먹는 멜로

달라진 젠더 감수성, 멜로드라마는 어떤 길을 가고 있나 잘되는 멜로와 욕먹는 멜로의 차이는 ‘새로움’ 여부

2019-02-23     정덕현 문화 평론가
멜로드라마는 남녀관계를 담는다. 그래서 그 시대의 달라진 남녀관계는 멜로드라마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과연 지금 멜로는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 로맨스를 담는 멜로드라마를 주로 써온 작가들이라면 요즘처럼 본격 멜로가 힘이 빠져가는 상황이 결코 쉽진 않을 게다. 멜로 하면 흔히 떠오르는 신데렐라와 왕자님 설정, 삼각·사각으로 얽히는 관계, 부모의 반대, 정신없는 워킹맘 같은 소재들은 너무 자주 반복돼 식상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최근 들어 성평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생겨난 새로운 ‘젠더 감수성’은 멜로드라마가 흔히 그려내던 관계나 상황들을 과거처럼 편안하게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러니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우기가 영 꺼려질 수밖에 없다.  

뻔한 멜로 공식, 이젠 안 통해

tvN 토일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그런 고민이 제목에서부터 느껴진다. 이 작품을 쓴 정현정 작가는 《로맨스가 필요해》 시리즈로 이름을 알린 작가다. 전공분야는 멜로지만 그걸 전면에 내세우다가는 자칫 시청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이혼녀 강단이(이나영)라는 인물의 현실을 먼저 집중 조명한다. 결혼 때문에 경력이 단절된 이른바 ‘경단녀’라는 현실을 가져온 이 인물은 경력 자체가 짐이 돼 버리는 취업시장에서 연거푸 좌절한 후, 아예 경력을 지워버리고 고졸 계약직으로  출판사에 입사한다. 드라마는 그러면서 ‘별책부록’이라고 주장하는 멜로를 끄집어낸다. 교통사고를 당할 걸 구해 줌으로써 어린 시절부터 인연이 된 연하의 차은호(이종석)가 바로 그 출판사의 편집장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강단이를 좋아해 왔다. 이렇게 경단녀의 현실은 슬쩍 뒤로 물러나고 다시 능력 있는 연하 왕자님의 도움을 받는 연상 신데렐라의 전형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물론 드라마는 팔리지 않는 책이 파쇄되는 장면, 생계 때문에 힘겨워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시인의 이야기 등으로 출판시장의 현실도 담아낸다. 하지만 여지없이 드라마의 중심은 다시 멜로로 돌아간다. 강단이를 좋아하는 북디자이너 지서준(위하준)이 등장하고, 차은호를 오래도록 짝사랑해 왔던 같은 출판사 직원 송해린(정유진)이 겹쳐지면서 그 흔한 4각관계가 만들어진다. 이나영과 이종석이라는 비주얼 끝판왕의 배우들이 자리하고 있어 그 그림만으로도 드라마의 힘이 어느 정도 유지되곤 있지만, 별책부록이라 여겼던 로맨스가 사실은 본권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어딘지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tvN 수목드라마 《진심이 닿다》는 설정이 뻔해 안타깝다. ⓒ tvN
tvN 수목드라마 《진심이 닿다》를 보면 그래도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훨씬 나은 편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설정이 너무 뻔해 어디선가 봤던 상황들이 자꾸만 떠오르는 안타까운 작품이니 말이다. 《진심이 닿다》는 광고 여신이긴 하지만 진심이 묻어나지 않는 발연기로 욕을 먹는 오윤서(유인나)가 연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 로펌에 들어와 변호사 권정록(이동욱)의 비서로 일하면서 생기는 로맨스를 담고 있다. 이미 설정만으로도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천송이(전지현)라는 배우가 등장하던 《별에서 온 그대》나 흔한 비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김비서가 왜 그럴까》 같은 작품들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과거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서 커플로 등장했던 유인나와 이동욱이 출연하고 있어 그 전작의 잔상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캐스팅은 완전히 다른 장르라면 모르지만 같은 장르에서 반복될 때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완전히 다른 관계를 보여줘도, 또 비슷한 관계를 반복해도 모두 기대치에서 멀어질 수 있어서다.  비서 캐릭터가 등장해 상사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반복해 등장하긴 했지만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은 소재다. 달라진 젠더 감수성 때문이다. 과거에는 비서라는 공적인 직무가 사랑이라는 사적인 경계를 넘어오게 될 때 어떤 설렘의 판타지를 주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 상하관계가 자칫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 여성 캐릭터의 능동성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비서가 업무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걸 쟁취해 내는 모습은 여성 시청자들에게도 그리 호감을 주지 못한다.  물론 《진심이 닿다》는 진심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주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너무 식상한 설정들은 자칫 이 드라마를 ‘비서 판타지’를 담는 드라마처럼 오인하게 만든다. 뻔한데 지금의 젠더 감수성과도 어울리지 않는 소재와 구도. 욕먹는 멜로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멜로는 이제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표적인 반증 사례가 바로 tvN 월화드라마 《왕이 된 남자》다. 케이블 채널이지만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상파와 비지상파를 통틀어 왕좌에 올랐다. 이 사극은 광대가 왕이 돼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지만 그 중심적인 힘에서 멜로를 뺄 수는 없다. 하선(여진구)이 광대라는 사실을 숨긴 채 왕 노릇을 하며 점점 중전 유소운(이세영)과 가까워지고, 결국 정체가 드러나지만 그래도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간다는 이야기는 사극으로서도 또 멜로로서도 파격적인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이 멜로에서는 애틋함과 함께 긴장감이 동시에 만들어지고, 신분과 정체를 뛰어넘는 멜로가 주는 감동이 있다. 이것은 다소 운명적인 사랑을 다뤄도 그 과거가 주는 느낌 덕분에 설득력을 갖게 되는 사극이 주는 장점이기도 하다. 
JTBC 《눈이 부시게》는 타임리프를 잘 버무려 전혀 색다른 멜로를 그려냈다. ⓒ JTBC

잘되는 멜로, 사극·퓨전으로 ‘참신함’ 빚어내

JTBC 《눈이 부시게》 같은 작품 또한 또 다른 성공적인 멜로의 사례다. 이 드라마는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리프 설정에 특이하게도 그로 인해 생기는 ‘대가’라는 코드를 집어넣었다. 즉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만 그걸 반복하는 만큼 빨리 늙어버린다는 설정이다. 결국 25살에 죽을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무한반복 되돌리다 할머니가 돼 버린 김혜자가 젊은 몸이었을 때 좋아하게 된 준하(남주혁)와의 특별한 사랑이 이 드라마가 그려 나가는 멜로다. 뻔할 수 있는 타임리프에 청춘멜로의 틀을 가져왔지만 이를 잘 버무려 전혀 색다른 멜로를 그려냄으로써 참신함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잘되는 멜로는 이제 《왕이 된 남자》나 《미스터 션샤인》 같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사극이나 시대극에서 발견되고, 때때로 타임리프 같은 새로운 장르와 섞여 변주되면서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결국 중요한 건 새로움이다. 멜로 그 자체가 식상해진 게 아니다. 그것보다는 틀에 박힌 구도와 구시대적 남녀관계를 반복하는 데서 오는 식상함이야말로 멜로가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