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 동행르포] 소녀상 지킴이들이 ‘3년째 거리에 있는 이유’

“일본군 성노예, 의식주 포기할 만큼 절박한 문제 해결되는 날까지 농성 계속될 것”

2019-02-19     류선우 인턴기자
‘빵’하고 차 클랙슨이 울린다. 또 깼다. 네 번째다. 경찰버스 공회전 소리가 다시 들린다. ‘쌩쌩’하는 차 소리도 이어진다. 눈을 뜨면 정면으로 가로등 불빛이 환하다. 틈새로는 찬 바람이 들어온다. 비닐천막이 나부낀다. 익숙해지려던 불편함이 다시 상기됐다. 잠들긴 글렀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아요.” 3년 넘게 농성 중인 강현경씨(25)는 몇 번이고 말했다. “옛날엔 자다가 비닐이 홀딱 날아간 적도 있는걸요(하하).” 그나마도 초창기보단 낫다. “농성 시작할 땐 파라솔 하나 못 펴서 길거리에서 물병 하나 안고 잤어요.” 그가 농성장에 처음 나왔던 날은 2016년 1월. 한파가 한창일 때다. 뜨거운 물을 안고 있으면 몇 시간 뒤 꽝꽝 얼었다. 지킴이들에 따르면, 지금의 농성장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안락하다. 한 평 남짓한 공간이지만 전기매트와 침낭에, 커피포트도 있다. 가끔 들어오는 찬 바람만이 이곳이 길거리임을 상기시킨다. 지킴이들은 ‘민심이 모인 장소’라고 표현했다. 시민 하나하나의 마음이 모여 만든 안락함이라는 의미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는 1144일째(2019년 2월15일 기준) 소녀상을 지키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맨땅에 매트를 깔고, 파라솔을 치고, 비닐을 덮어 24시간 교대로 노숙농성을 한다. 농성은 2015년 12월30일, ‘한·일 합의’ 이틀 뒤 시작됐다. 박근혜 정부가 소녀상 철거를 두고 이면합의를 했다는 얘기가 돌자, 이를 막기 위해 나섰다.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함께하는 인원도 열 명 안팎으로 줄었다. 하지만 이제껏 농성이 중단된 적은 없다. 이들이 농성을 이어가는 이유는 뭘까. 1월30일, 그들과 하루를 보냈다.
1월31일 소녀상 지킴이 배승빈씨가 농성장 가판대의 날짜를 바꾸고 있다. ⓒ 시사저널 류선우

여전히 소녀상 ‘지킴’이 필요하다

계민혁씨는 올해 스무 살이 됐다. 고2 때 수요시위에 나왔다가 거리에서 자는 대학생 누나·형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작년에는 수험생이라 함께하지 못했다는 그는, 이제 일주일의 반 이상을 농성장에서 보낸다. 민혁씨는 “여기 오면 생활이 불편한 만큼 더 경각심을 갖고 고민하게 돼요”라고 농성장에 나오는 이유를 설명했다. 앳된 얼굴이지만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 말할 때만큼은 단호하다. “그런다고 해결이 되냐, 왜 너희 시간을 버려가며 그렇게까지 하냐는 비난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요, 이게 아니면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죠? 선거로 세상을 바꾼다고요? 촛불혁명까지 하며 정권을 바꿨지만 나아진 게 없잖아요. 사회는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누군가는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하는 거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할 뿐이에요.” 박소현씨(30)는 농성 시작부터 지금까지 3년째 참여 중이다. 소현씨는 “의식주를 포기할 만큼 절박한 마음으로 농성을 시작했다”며 입을 열었다. “그땐 당장 내일이라도 소녀상이 강제로 철거될 상황이었어요. 물리적 위협이 왔을 때 바로 몸을 던져 지킬 사람이 필요했죠. 지금까지도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소녀상에 위협적인 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소녀상은 여전히 ‘안전하다’고 보기 어렵다. 종로구에 있는 소녀상은 2017년 ‘공공조형물’로 지정됐다. 함부로 철거할 수 없는 법적 근거는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일본 아베 총리는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국 정부에 소녀상 철거를 요구해 왔다. 정권이 바뀌면 언제든 박근혜 정부 때와 같이 위협적인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일반인에 의한 위협도 상당하다. 2016년엔 한국인에 의한 ‘망치 테러’가, 2012년엔 일본인에 의한 ‘말뚝 테러’가 있었다. 3년째 농성 중인 김아영씨(25)는 “소녀상에 대한 위협이 계속된다는 건 누군가에겐 소녀상이 너무 불편하다는 의미예요. 아직 우리가 이곳을 지켜야만 하는 이유죠”라고 했다. 이날의 농성장 당번은 농성 2년 차인 배승빈씨(23)와 박상현씨(25)다. 아영씨도 김복동 할머니 장례 이후 발표할 성명서를 준비하느라 같이 밤을 지내게 됐다. 상현씨는 맨발이다. 농성장이 매우 익숙해 보인다. 그는 청주에 살지만 매일 두 시간씩 버스를 타고 올라온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여기 있음으로써 더 많은 이들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해 변화의 동력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전기매트, 침낭 등이 있는 농성장 천막 내부는 ‘민심이 모인 장소’이다. ⓒ 시사저널 최준필

농성장은 사회변혁의 ‘구심점’

지킴이들은 절박한 투쟁방식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환기하고 해결해 가는 구심점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승빈씨는 “저희는 단지 소녀상만 지키는 게 아니에요. 의식주를 포기함으로써 끊임없이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거죠. 정치권에 해결의지가 있다면 저희의 존재가 푸시(push)가 될 테고, 없다면 비판이자 규탄이 되겠죠”라고 말했다. 아영씨는 “필요한 거 없냐며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요. 본인 옷은 허름하게 입고 20만~30만원씩 쥐여주고 가시는 분들도 계시죠. 이게 민심이에요. 우리는 그 민심을 모으고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기자가 머물던 하루 동안에도 비닐 천막을 두드려 무언가 주고 가는 이들이 끊임없이 왔다. 2년 넘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음식을 주고 간다는 ‘고로케 아저씨’도 어김없이 찾아와 고로케를 한가득 주고 갔다.

직접 만든 단팥빵을 주러 온 전성혁씨(37)는 “지킴이들을 보면 뜨거운 게 올라와요. 뜻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종종 와요”라고 했다. 밤 10시가 넘어 ‘전기난로를 주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종로에서 장사를 한다는 채광남씨(78)는 “청년들이 여기서 밤을 지새운다는 뉴스를 보고 계속 마음에 걸렸다”며 “보고 가니 마음이라도 후련하네”하며 돌아갔다.
지킴이들의 목표는 ‘2015 한·일 합의’ 폐기와, 일본군 성노예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 및 법적 배상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난색을 표한다. 하지만 이들은 반드시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영씨는 “많은 분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말하지만 변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어요. 농성장도 처음과 달리 이렇게 바뀌었잖아요. 역사는 항상 힘 있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민중들이 거리에서 바꿨다고 생각해요. 그 믿음으로 끝까지 싸울 거예요”라고 말했다. 1월31일 아침 9시. 지킴이들의 일상은 다시 시작됐다. 함께 밤을 지낸 아영씨와 승빈씨, 상현씨 중 세수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잠을 푹 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생활의 불편함보다 이들에겐 중요한 것이 있다. 이들이 계속해서 거리에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