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TV를 통해 녹화 중계된 김정은 위원장 신년사 분위기는 상당히 파격적이다. 마치 서방국가의 정상처럼 양복을 입고 집무실로 내려와 소파에 앉아 편안하게 신년사를 낭독했다. 뒤로는 선대인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화가 걸려 있다. 외신들은 마치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노변정담(爐邊情談) 같은 느낌이었다고 평가했다. 단상에 서서 다소 딱딱하고 강한 톤으로 신년사를 낭독하던 한 해 전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올해 신년사의 특징은 과거와 달리 경제 및 대남, 대미 관계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는 점이다. 대남, 대미 관계가 좋아져야 궁극적으로 북한의 숙원인 경제 재건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
2018년 신년사에서 22회씩이나 언급했던 핵 관련 단어는 두 번밖에 말하지 않은 반면, ‘평화’라는 단어는 10회에서 25회로 배 이상 늘어났다. 당분간 대화 모드를 깰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제’와 관련된 단어의 사용 빈도도 한층 높아졌다.
그러면서도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배치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했다. 이를 두고 보수층 일각에선 ‘한·미 동맹’ 균열을 노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을 갖고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당분간 한·미 양국이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군사행동을 자제할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요구가 남북관계 발전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적다”고 전망했다.
우방세력을 활용한 경제제재 해제도 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신년사에서 김 위원장은 최대 우방인 중국과 세 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것과 2018년 11월 또 다른 반미(反美) 국가인 쿠바의 미겔 디아스카넬 국가평의회 의장의 방북을 높이 평가했다.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해선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계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보장 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해 앞으로의 평화체제 협상에 중국을 포함시키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올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한 해 전보다 경제 재건 의지를 더더욱 분명하게 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라는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됐다. 동시에 남한 정부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검증 과정에 포함돼 있는 국제기구의 영변 핵시설 사찰 및 영구폐기가 이루어질 경우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은 곧장 재개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번 신년사에서 “만약 미국이 북한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해 일방적으로 북한의 양보만을 강요하고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에만 매달린다면 부득불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고 밝힌 것은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악의 경우 과거의 경제·핵 병진노선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시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