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왜 일본 열도서 열풍 부나

의과대학 입시 부정 사건 통해 여성 차별 드러난 것도 인기 요인

2019-01-07     류애림 일본 통신원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의 경험이 일본 대다수 여성이 겪었던 일과 같습니다. 도쿄의과대학, 준텐도(順在天堂)대 의학부 입시 부정 소식에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이 뉴스에 조금이라도, 또는 강렬하게 무엇인가를 느낀 사람에겐 큰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2018년 12월7일 일본에서 발간된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아마존 재팬의 독자 리뷰 일부분이다.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책은 아마존 재팬 아시아문학 부문 1위에 오를 정도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성차별과 불평등에 일본도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군 의학부 입시 부정 문제를 통해 일본 사회의 여성차별이 여실히 드러난 것도 이 책의 인기 요인 중 하나다. 2018년 8월 일본에선 도쿄의과대학의 입시 부정 사실이 밝혀졌다. 문부과학성 관료가 자식의 입학을 부정 청탁한 사건을 계기로 조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 수년간 부정 입시가 이뤄졌고, 여성 수험자에게 불리한 점수 조정을 통해 여성의 합격을 제한했다는 내용이 밝혀졌다. 도쿄의과대학 측은 “여성은 나이를 먹으면 의사로서 활동성이 떨어진다” “여성은 결혼과 출산으로 일터를 떠나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게 된다” 등의 이유로 여성 수험자에게 남성보다 엄격한 합격 기준을 설정했다고 한다.  이후 81개 대학의 의학부, 의학과를 대상으로 조사가 확대됐다. 조사 결과 4개 대학에서 여성차별이 있었다고 밝혀졌다. 준텐도대학의 경우 여성 수험생의 합격 라인을 남성 수험생보다 높게 설정했다. 대학 측은 “일반적으로 대학 입학 시점의 연령에서 여성의 정신적 성숙이 남성보다 빠르고, 상대적으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높은 경향이 있다”며 “판정의 공평성을 확보하기 위해 남녀 사이의 차이를 보정한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여성 수험자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높기 때문에 남성 수험자를 구제하기 위해 조정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최근 도쿄의과대학 등에서 여성에게 불리하도록 입시가 진행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동안 일본에서 누적돼 온 성 불평등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 AP 연합

日 성 평등 지수 110위, 빛바랜 아베 정책

일본은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8 성(性) 격차 보고서’에서 149개국 가운데 110위를 기록했다. 한국보다 다섯 계단 높은 수치다. 하지만 몇몇 하위 항목에선 한국보다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국회의원과 각료의 여성 비율, 여성 국가 수장의 재임기간 등을 기준으로 산정하는 정치적 권한 지수는 125위(한국 92위), 전문직 및 기술직 지수는 108위(한국 86위)를 기록했다.  일본 사회에서도 성 불평등은 오랫동안 지적돼 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도 현재진행형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모든 여성이 빛나는 사회 만들기’를 정책 목표 중 하나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각 구성원들의 태도를 살펴보면, 정책에 대한 실현 의지에 의문 부호가 달린다. 2018년 4월엔 일본 재무성 차관의 여기자 성희롱 파문이 있었다. 후쿠다 준이치 당시 재무성 차관은 상습적으로 여기자를 성희롱했다. ‘주간신초’를 통해 음성 파일이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전까지 후쿠다 전 차관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게다가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은 “성희롱은 죄가 아니다” “덫에 걸려들어 당한 것일 수 있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성희롱 사실을 고발한 여성은 TV아사히 기자였다. 계속된 성희롱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녹음을 했다. 회사 내 부서장에게도 관련 사실을 보고한 뒤 보도를 요청했다. 하지만 부서장은 보도할 경우 피해 기자의 신원이 노출돼 2차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보도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놓고 일각에선 성희롱 피해를 입은 사원을 방치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실제로 회사 차원에서 재무성과 후쿠다 전 차관에게 항의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주간지를 통한 보도에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여성 사원의 인권 보호는 뒷전으로 미루고 출입처와의 관계를 중시한 결과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의식해서인지 2018년 6월 아베 내각이 발표한 ‘여성 활약 가속을 위한 중점 방침’의 구체적 항목에는 성희롱 근절을 위한 대책 추진이 추가됐다. 2017년에는 성희롱에 관한 대책은 포함되지 않았다. 
도쿄의과대학의 유키오카 데쓰오 상무이사(왼쪽)와 미야자와 게이스케 학장 직무대리가 2018년 8월7일 입시 부정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 AP 연합

‘미투 운동’ 반응마저 달랐다

2018년 일본에서도 ‘미투 운동’은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이 운동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물론 인터넷, 특히 트위터상에서는 ‘#MeToo’가 확산되기도 했고, 의학부 부정 입시가 발각된 이후로는 ‘#우리들은 여성차별에 화를 내도 된다’는 투고가 늘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서의 ‘화제’에 그쳤을 뿐이다.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차가운 시선과 협박에 일본을 떠나야만 했던 이도 있다. 성차별 문제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부족한 탓이다. 의학부 부정 입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준텐도대학의 부정이 밝혀진 뒤 15명 정도의 학생이 침묵시위에 참가한 것이 전부였다.  도쿄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한 20대 여성은 “대학 진학부터 법학전문원, 수습 시절까지 남성이 절대적으로 많은 집단에서 생활하며 성차별적 발언과 차별을 경험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한다. 의학부를 지원한 학생들의 꿈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출발부터 좌절되어야 했던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시위 등 사회적 운동보다 국회 등 제도적 틀 안에서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의식을 갖고도 직접 나서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 세대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합격한 수험생들을 일부 구제했다. 불이익을 당한 학생들도 학교 측에 법적으로 책임을 물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부정 입시 사태와 관련해 책임자 위치에 있는 문부과학상이 “어차피 떨어졌을 분들”이라고 발언하는 등 피해자들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적 틀에서의 해결은 요원한 일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사례다.  일본의 여성차별을 비롯한 사회문제에 대한 사회적 대응은 뜨겁고 열정적인 한국에 비해 차갑고 냉담하다. 두 사회가 문제를 대하는 차이가 이후의 여성차별 해소에 어떻게 작용할까. 세계경제포럼은 일본이 양성평등을 이루는 데 108년이 더 걸릴 것이라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