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있는 것에게는 아름답다는 말 하지 않아”

신작 장편소설 《네가 이 별을 떠날 때》 펴낸 한창훈 작가

2018-12-28     조철 북 칼럼니스트

또 한 해가 저물었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날들을 보내서인지 세밑이 훈훈하지는 않을 듯하다. 거문도에서 태어나 온갖 직업을 거쳐 전업작가로 살고 있는 한창훈 작가가 최근 신작 장편소설을 펴냈다.

“맞아. 바다 때문에 생긴 운명이야. 그리고 저 파도와 바람은 선원이나 섬사람들의 운명이기도 하지. 이것 때문에 곤란을 겪고, 다치고, 심지어 죽기도 하는데 계속 만나야 하니까. 우리 선원들 세계엔 이런 노래가 있어. ‘파도 고랑마다 선원들 무덤이 있네.’ 그런데도 우리는 배를 타고 나가. 하지만 파도와 바람이 없다면 그게 어디 바다겠어?”

《네가 이 별을 떠날 때》는 평생을 바다에서 외롭게 살아온 한 사람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나 그와 소통하며 삶을 통찰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일평생 짙푸른 망망대해를 동경하고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굴곡진 인생사를 사랑해 왔다.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닷사람들이 뿜어내는 생생한 활기를 소설화해 ‘한국의 헤밍웨이’로 불리기도 하는 작가의 이번 소설은 전작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고독감은 깊어졌고 회상하는 시선은 더욱 먼 곳을 향한다.

“밤낚시란 지루한 행위다.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름다운 별들과 별빛을 반사하며 출렁이는 바다, 허공을 지나가는 등대 불빛이 아름답다고 생각할 테니까. 물론 아름답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날마다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돌아보면 늘 있는 것에게는 아름답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네가 이 별을 떠날 때》 |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264쪽 | 1만3000원 ⓒ 문학동네·김무환 제공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이어 쓴 소설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인간의 야무진 생명력보다는 소중한 존재의 죽음과 그 후 남겨진 이들의 삶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역설적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생의 순간들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이제껏 작가가 그려온 어떤 장면보다도 그 자신의 삶에 가까이 닿아 있는 듯하다. 26년간 소설을 써온 작가로서, 태어나고 자란 거문도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섬사람으로서 삶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쓴 것일까. 이 작품은 마치 이별을 준비하듯이, 작가가 이제까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모든 이야기를 이 한 권의 소설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신비로운 이야기는 상상과 비밀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실토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기도 한다. 전쟁을 싫어했던 생텍스는 계획 항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바닷가를 비행하다가 총격을 당했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떨어진 것이다. 그러면 끝이다. 모든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그런데 나에게 온 아이 때문에 끝났던 이야기가 이어지는 이 상황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네가 이 별을 떠날 때》는 어린 왕자가 다시 한번 지구에 온다면 어떤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을지 상상하며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이어 쓴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생텍쥐페리가 남긴 사소한 설정 하나하나를 작품으로 끌어와, 어린 왕자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복원해 낸다. 사막에서 생텍쥐페리를 만난 후 8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지구를 여행하는 어린 왕자의 눈에 비친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니 아무 일 없는 게 가장 좋은 목표야”

“화물선은 아무 일이 없는 게 목표야. 아무 일 없이 제시간에 제 항구에 도착하는 것. 단지 그것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을 목표로 일들을 해. 조금 우습지? 전쟁도 그럴 거야. 우리의 목표는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전쟁 같은 게 아예 안 일어나도록 하는 거겠지. 아무 일 없는 게 가장 좋은 목표야.”

주인공 남자와 소년은 아내와 생텍쥐페리라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같은 상처를 공유하며 빠르게 가까워진다. 동화와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일생에 걸쳐 뼈저리게 자각해 온 남자 앞에 선물처럼 나타난 어린 왕자. 남자는 아이와 배를 타고,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바닷속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얼어붙은 마음을 점점 녹여간다.

하지만 생텍쥐페리와의 추억을 더듬어보기 위해 사막을 찾은 어린 왕자는 과거의 잘못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는 미운 지구별의 모습을 재확인한다. 작가는 애수 어린 문체로 어린 왕자와의 또 한 번의 이별을 먹먹하게 그려낸다. 어린 왕자를, 우리는 언제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날 있다. 평생 살면서 최소한 한 번은 마주치게 되는 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허전함만 끝까지 확장되는 날. 만약 그것 때문에 경찰이 체포하러 온다고 해도 그러라고 해 버리고 싶은 날. 다만 몇 시간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날. 딸아이는 돌아갔고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 비가 내리는 밤. 모두가 나에게서 떠나가고 있다는 느낌만 강렬했다. 심지어 태양도 나를 피해 져버린 것 같고 평온하던 날씨도 내가 싫어 멀리 가버린 것만 같았다. 바람도 불어오는 게 아니라 불어가버리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작가는 3년 전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이것을 쓰고 싶어 작가가 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완성된 작품을 내놓으며 ‘자신의 총화이자 총력이자 결론’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동안 일만 번 바닷가를 걸었다. 일만 번의 횟수가 채워진 날 문득 ‘그 무엇’이 나에게 왔다. 비로소 나의 행보가, 심지어 인생까지도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했다. 이러려고 그 많은 바닷가 길을 거쳐왔구나, 생각이 들면서. 그게 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