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의 5년 야심작 《PMC: 더 벙커》 뚜껑 열어보니
‘전쟁 민영화’ 바람 타고 유망 산업 떠오른 PMC 직군 집중 조명
《PMC: 더 벙커》에 등장하는 독창적인 인물군
국내 관객들에게 PMC란 호칭은 낯설지언정, 존재는 낯설지 않다. ‘전쟁터의 청부업자’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돈을 받고 무력을 파는 민간 용병들. 1973년 미국이 징병제를 철폐하면서 태동했고, 걸프전을 거치며 급성장한 PMC는 ‘전쟁의 민영화’ 바람을 타고 유망 산업으로 떠오른 직군이다. 할리우드가 이러한 PMC를 영화 안에 알게 모르게 녹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액수만 맞으면 무엇이든’ 오케이였던 《익스펜더블》의 노익장들 ‘익스펜더블스’ 팀이 이러한 PMC의 대표적 유형.
캐서린 비글로우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긴 《허트 로커》에서도 ‘콘트랙터’ 팀이란 이름의 PMC를 잠시 만날 수 있다. 이라크전에 참전한 미군 폭탄 제거팀(EOD)이 적인 줄 알고 교전을 벌일 뻔한 이들이 바로 PMC다.
그동안 국내 상업영화에서 군인 신분의 주인공들에게 주로 부여된 동기는 애국심 내지는 명예 혹은 전우애와 같던 가치였다. 《PMC: 더 벙커》는 PMC를 적극 끌어오면서 이념이나 국가가 아닌, 한 개인의 심리에 보다 자유롭게 접근할 기회를 얻었다. 실제로 리더 에이헵(하정우)을 추동하는 것은 국가의 안위나 애국심이 아닌, 내 가족과 나의 삶을 안락하게 해 줄 돈이다. 에이헵은 국내 상업영화 안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새롭고도 독창적인 인물군인 셈이다.
《PMC: 더 벙커》는 ‘하정우가 또 갇혔다’라는 설정으로 인해 《터널》 《더 테러 라이브》를 연상시키지만, 에이헵을 설명하는데 더 근접한 영화는 오히려 《암살》의 하와이 피스톨이다. 국적을 지우고 미국 불법체류자로 떠도는 에이헵은, 친일파 아버지를 지우고 소속 없이 떠도는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과 일견 닮았다. 그리고 삶을 낭비하는 인생을 살다가 독립군 안옥윤(전지현)을 만나 인생의 커브를 틀었던 하와이 피스톨처럼, 에이헵도 직업 정신이 투철한 북한 닥터 윤지의(이선균)를 만나 인격적으로 성장한다.
소재와 함께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하는 건 게임 인터페이스를 적극 끌어안은 화면 구현이다. 배우들 헬멧에 장착한 POV(1인칭 시점) 캠은 관객들로 하여금 1인칭 슈팅 게임(FPS)에 참전한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 ‘보는 영화’가 아닌, ‘체험하는 영화’로 《PMC: 더 벙커》가 기능하길 원한 감독의 야심이다. 용병들이 미션을 완료했다고 생각한 순간, 예기치 않은 상황과 새로운 적들을 벙커 안으로 투입하면서 인물들의 생존이 ‘게임 스테이지’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PMC: 더 벙커》는 충무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아티스트들이 들러붙어, 영화가 허락한 도구를 거침없이 사용한 만큼 결연한 작품 같단 생각도 든다. 김병서 촬영감독의 손에서 탄생한 카메라 워킹이 시공간의 제약을 돌파하고, 그룹 캐스커 출신 이준오 음악감독이 만든 사운드의 박력이 스크린을 진동시킨다.
그리고 여기에서 감독이 의도한 또 하나의 설정이 등장한다. 에이헵에게 치명적인 결함을 달아, 그가 한 공간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로 만든 것이다. 하정우의 액션을 기대하고 극장에 간 관객들에겐 일견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시점을 에이헵에게 한정시킴으로써 인물의 내적 갈등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장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발이 묶인 에이헵은 통제실에 띄운 스크린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며 지령을 내리는 방법으로 위기에 대처한다. 에이헵은 그러니까 게임 유저에 가까운데, 감독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하정우에게 보다 복합적인 미션을 발부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미션을 부여하는 동시에, TV로 생중계되는 국제정세를 살펴야 하고, 주요 인물을 살리기 위해 의사 역할을 자처하면서, CIA 핵심 팀장 맥켄지(제니퍼 엘)와 협상을 시도하고, 이 와중에 전투가 능하지 않은 윤지의의 안내판 역할까지 해내야 한다. 도전 앞에 망설임이 없는 하정우는 이 어려운 임무를 능숙하게 저글링 해내며 에이헵 캐릭터에 인간미를 부여한다.
관성적으로 찍어내던 남북 관련 소재 뒤집어
《PMC: 더 벙커》의 약점이라면 정보 흡수율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다. 일단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를 전달하는 것에 대한 명료함이 떨어진다. 극 초반 뉴스까지 등장시켜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전략이 도리어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이 모든 걸 구체적 에피소드가 아닌, ‘말’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말의 대부분이 영어인지라, 국내 관객으로선 ‘읽는’ 프로세서도 거쳐야 하는 피로도가 있다. 용병들의 개성이 미약한 가운데 몇몇 캐릭터의 경우 등·퇴장이 불분명하게 처리돼 있어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장점들은 단점들보다 농도가 진하다. 게임 문법이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겐 저항감이 있을 수 있지만, 미로처럼 구현된 가상의 공간 안에서 색다른 체험을 하고 싶은 호기심 강한 관객들에겐 이전에 본 적 없는 얼얼한 에너지를 전달할 것이다. 공간 활용 능력과 캐릭터 설계감이 좋은 김병우 감독은 ‘남북 관련 소재’가 관성적으로 찍어내는 문법에 함몰하지 않고, 그만의 인장을 벙커 안에 박아낸다.
취향을 가리지 않고 쾌재를 부를 장면도 있다. 극 후반에 설계된 고공낙하 신이다. 비행기에서 점프한 후 바람의 저항을 브레이크 삼아 목표점을 향해 공중 구르기를 하는 에이헵의 율동은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톰 크루즈) 못지않게 박력 넘치고, 카메라의 타이밍과 액션 설계는 기존 한국영화의 용량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화끈하다. 에이헵의 부족한 액션에 대한 아쉬움을 바람막이해 내는 아드레날린 역시 여기에서 터져 나온다. 안전하게 기획된 몰개성의 영화들과 거리 두기를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PMC: 더 벙커》의 도전은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