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호진 ‘황제 보석’ 논란 키운 법원·검찰의 직무유기
입법조사처 “美 ‘보석 감시관’ 같은 감시 장치 확충해야”
‘황제 보석(保釋)’ 논란을 일으킨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7년9개월 만에 구치소에 재수감됐지만, 법원과 검찰이 지금처럼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보석 조건의 이행 감독에 손 놓고 있다면 이런 사태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직접 나서 ‘황제 보석’ 논란과 관련해 제도 개선에 노력하겠다고 밝혔지만, 시사저널 취재 결과 법원과 검찰은 병보석과 관련한 기초적인 통계조차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형사소송법상 보석 취소는 법원이 정한 조건을 위반한 경우 가능하다. 법원이 직권으로 결정하거나 검찰의 취소 청구를 받아 결정한다. 이런 이유로 이 전 회장의 ‘황제 보석’ 논란에 법원과 검찰 모두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정작 법원과 검찰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거나 뒷짐만 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2년 전 “이탈” 제보에도 법원·검찰은 ‘뒷짐’만
이 전 회장은 2011년 400억원대 배임·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됐으나 간암 등을 이유로 63일 만에 보석으로 석방됐다. 법원은 당초 보석으로 그를 풀어주면서 “집과 병원만 오가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그는 주거지와 병원을 벗어나 음주와 흡연을 하고 떡볶이를 먹는 모습 등이 언론에 포착돼 ‘황제 보석’ 논란이 일었다. 음주와 흡연을 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만큼 건강한데도 특혜를 받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그는 1, 2, 3심과 파기환송심, 재상고심을 거치는 7년8개월 동안 병보석이 그대로 유지돼 구속을 피해 왔다.
논란이 일자 검찰은 “이 전 회장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 보이고 중한 처벌이 예상돼 도주할 우려가 있다”며 보석 취소를 요청했다. 공을 넘겨받은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오영준)는 12월14일 이 전 회장의 보석을 취소했다. 법원 결정 즉시 검찰은 이 회장을 서울 남부구치소에 다시 수감했다.
사실 이 전 회장이 환자 같지 않은 모습으로 병원과 집 이외에서 계속 목격된다는 의혹은 이미 2년3개월 전에 정치권과 언론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제기됐다. 당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전 회장이 집과 병원이 아닌 사찰 등에 있는 사진을 공개하며 “상당히 건강한 모습으로 병보석 중인 상태가 맞는지 의심된다”며 검찰에 보석 취소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에 법조계에서는 검찰과 법원의 이번 대응이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목소리가 많다. 법원과 검찰이 이 전 회장의 보석 조건의 이행 감독 업무를 한 번이라도 철저히 했다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과연 생겼겠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한다. 법원과 검찰은 ‘황제 보석’ 논란의 재연을 앞으로는 막을 수 있을까. 의지는 천명됐다. 지난 10월29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법무부와 법원이 함께 제도 개선을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안철상 법원행정처장도 “문제가 있다. 제도 개선을 할 필요가 있고,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두 달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시사저널은 그동안 법원과 검찰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 국회의원의 도움을 받아 병보석 관련 기초 자료와 실효성을 높일 방안 등을 공식 질의했다. 사법부의 공식적 답변을 듣고 싶어 입법부의 힘을 빌렸다. 검찰은 “병보석 관련 통계는 법원 소관 사항”이라고 답했다. 법원은 “병보석 피고인 수 자료는 별도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아울러 “병보석 피고인에게 법원이 보석 조건을 제대로 지키라고 경고한 건수와 집행 정지 자료 역시 별도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병보석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과 현재 논의 중인 대책에 대한 질의에 대해 검찰은 “검찰이 적극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있는지, 어떤 방안이 효과적인지 검토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경우에 따라선 여전히 이 업무는 ‘법원 소관’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답변이다.
법원은 다소 애매한 대답을 내놨다. 우선 “법원은 보석 허가 결정을 할 때 형사소송법 제98조의 보석 조건이 피고인의 출석을 실질적으로 담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보석 허가 결정에 따라 석방된 피고인이 보석 조건을 준수하는 데 필요한 범위 안에서 관공서나 그 밖의 공사단체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대원칙을 밝혔다. 보석 조건의 이행 감독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적절한 조치’가 뭘까. 법원은 “보석 조건 준수 여부를 감독하기 위해 피고인의 주거지를 관할하는 경찰서장에게 피고인이 주거제한을 준수하고 있는지 여부, 출입국사무를 관리하는 관서의 장에게 피고인에 대한 출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법원은 몇 가지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피고인 주소지의 동사무소에 피고인의 주민등록이 이전되는 경우 통지해 달라는 요구,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사건에서 상담소나 피해자 보호시설에 대해 피고인의 피해자에 대한 접근 시도 등이 있으면 통지해 달라는 요구, 피고인이 근무하는 공사단체에 피고인의 출근 여부 등에 대한 통지 요구, 피고인이 의료기관에 입원한 경우 그 치료 경과에 관한 통지 요구, 피고인의 주거를 병원으로 제한한 경우 피고인이 이탈하면 법원에 통지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 등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법원의 애매모호한 태도
궁금했다. 왜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할까. ‘요구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그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재차 물었다. 지금까지 법원이 ‘요구할 수 있다’고 한 사안들을 실제로 ‘요구한 사례’가 있는지 밝혀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담당자는 “법원이 밝힌 부분을 지금까지 실제 요청한 사례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후 계속된 취재에는 공보 부서에 물으라고 했다. 공보 부서에서는 시사저널의 구체적 질의에 요청한 날짜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병보석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어떤 대책을 고민하고 있을까. 국회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입법조사처는 ‘보석 조건의 이행 감독을 위한 감시 장치의 확충’을 강조했다. 최근 ‘보석 제도의 실효적 운영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한 조서연 입법조사관은 “미국에서는 구속 및 보석 자료에 대한 수집, 보석에 의한 석방자 감시 및 보고 기능을 수행하는 보석 감시관 제도가 있다”며 이를 참고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보석 감시관은 중죄·경죄 사건에서 구속 및 보석 관계 자료를 사전 조사해 치안판사에게 보고하고, 수사기관과 연결되는 컴퓨터로 전과조회를 하며, 피의자를 면접해 구금 계속 여부와 적절한 보증금 산정에 필요한 자료조사 및 의견을 제출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