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학자’와 고서점(古書店) ‘신센도’
[이인자 교수의 진짜일본 이야기] 이소다 미치후미 베스트셀러 《무사의 가계부》 사료 제공한 고서점
“인연이지요. 사료(史料)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으로 탄생되는 건 여러 인연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센다이(仙臺)에서 도쿄(東京)까지 찾아온 저에게 고서점 신센도(秦川堂) 점주 나가모리 유즈루(永森讓·79)씨가 산소호흡기를 부착한 상태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지난 11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도쿄의 고서점가인 진보초에서도 굳이 신센도 점주를 만나기 위해 나섰습니다. 마침 오랜 지인인 금바라 하루오(金原春雄·79)씨가 점주와 고등학교와 대학 동기라며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고 동행해 줬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안 사실이지만 두 사람은 50여 년 만에 만났다고 합니다. 심장수술로 산소호흡기를 휴대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서점까지 나와 만나준 데는 옛 친구와의 만남을 귀히 여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서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일본의 근대역사학자 이소다 미치후미(磯田道史)씨가 쓴 《무사의 가계부(武士の家計簿)》라는 책을 통해서입니다. 학술교양서임에도 불구하고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 제작까지 하게 된 서적입니다. 역사학자인 이소다씨는 이 책을 쓸 수 있게 한 역사적 자료를 고서점 신센도의 목록에서 발견했습니다.
창업 100년 넘은 고서점 중에서도 역사 깊은 곳
그 목록에 가나자와번(金澤藩) 이노야마 집안(猪山家)의 가계부와 일기 서편 등의 자료가 15만 엔(약 150만원)에 제시돼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중요한 사료라고 직감하고 고서점 신센도에 가서 구입합니다. 사료는 1842년에서 1879년까지 37년간 일본 무사(武士) 집안의 가계부와 일기 서편의 기록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지금으로 말하면 회계 담당 경리가 쓴 기록물이었던 것입니다. 책 서두에 연구 1차 자료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2년간 사료를 검토하고 연구해 태어난 책이 《무사의 가계부》입니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는 이소다씨를 일약 스타 학자로 만든 것뿐만 아니라 에도(江戶) 시대의 무사에 대한 실증적인 생활문화 연구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사료를 갖고 있었고 제공해 준 고서점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고서점 신센도는 창업 100년이 넘는, 고서점 중에서도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고서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진보초 안쪽, 빌딩 2층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빌딩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이와나미 빌딩이었습니다. 이곳으로 이사한 것은 1978년이라고 합니다.
빛바랜 고지도 엽서 등을 하나하나 투명한 비닐에 싸서 가격표를 붙여 진열해 책장 가득 채운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3층 서고로 안내됐습니다. 서고는 상품으로 내놓기 위해 정리 중인 것을 보관하는 장소이자 그것을 정리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은 목록을 출판하기도 하지만 인터넷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기에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력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했습니다.
“우리 집은 30년, 40년 일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제는 너무 나이 먹어 일하기 어렵고 그런 사람은 컴퓨터 일은 하지 못해 젊은 사람을 구하는데 생각보다 어려워요.”
그러면서 노란 종이박스와 정리 중인 인쇄물들이 가득 차 있는 서고 한 귀퉁이 자리를 권했습니다.
“2층으로 서점을 옮길 때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거래하던 사람들은 찾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1층은 너무 비싸 가게를 유지하기 힘들었지요. 마침 40년 전에 싼 가격에 2층을 제공해 준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지요. 자료가 늘어 3층을 서고로 사용하게 되었고요. 아마 이 서고만 정리해도 난 편안히 살 수 있겠지만 그걸 못 합니다. 허허.”
서점이 간판도 크게 달지 않고 2층에 위치한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 찾아와 책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고서점 상황도 시대의 흐름에 밀려 계승이 어려워지고 문을 닫는 곳도 많다고 합니다. 고서점 점주 3대째인 나가모리씨는 밑에서 일하던 우수한 부하직원이 한 명 독립하고 아들과 사위가 각각 다른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문 사례입니다.
훌륭한 학자 키우는 데 전문화된 고서점도 한몫
일본의 고서점은 전문화돼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정치·경제·문화·역사·의학·과학 등 분야는 물론이고 지도·엽서·사진·포스터·만화 등 종이를 매체로 한 다양한 자료들을 서점에 따라 특징 있게 취급합니다. 백화점식의 고서점은 없고 특화시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들과 사위는 나가모리씨가 취급하는 분야는 안 하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주로 행정서류를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고, 사위는 의료서적을 중심으로 과학서를 취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메키키(目利き·진짜를 알아보는 눈)가 중요하지요. 이것은 단시일 내에 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20년 정도 걸리는 것 같습니다.”
도쿄 내에 있는 600여 고서점은 매주 서점 간 경매를 한다고 합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물건이 자신의 서점과 맞지 않는 경우 경매시장에 내놓아 팔고, 그렇게 나온 물건 중 필요한 것은 사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무엇이든지 팔리는 시대였고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물건은 많은데 사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무엇을 남길지 고서점 주인들은 고민한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인 양 밀감박스에 담겨져 있던 사료를 우리가 보관하고 목록에 넣어 내놓았을 때 이소다 선생이 발견해 준 것은 정말 큰 기쁨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판독도 못할 정도의 기호에 불과했던 가계부를 다른 자료와 함께 풀어 에도 시대의 한 면모를 그려낼 수 있도록 한 것은 이런 고서점의 점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연구자는 아니지만 연구자 이상으로 자료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것이지요. 나가모리씨는 이소다씨 외에도 많은 역사학자와 일을 했다고 합니다. 좋은 자료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고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상의하면서 자료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탁 받으면 자신의 연구는 아니지만 다른 서점 점주들에게 부탁까지 해서 구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훌륭한 학자를 키워내는 데는 대학, 연구기관, 도서관만이 아니라 이러한 거리의 고서점도 한몫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서점은 문화를 계승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후세에 뭘 남길 것인지 그것을 선택하는 직업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고서점은 현대판 문화재의 리사이클(재사용) 장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고서점에 대해서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고서점의 생태계에 대해 더 알고 싶고 전하고 싶습니다. 매주 있다는 경매를 살피고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