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차게 빼들었던 ‘브렉시트’, 최악으로 치닫나
英 브렉시트 합의안 투표 연기 후 답보상태…테리사 메이 총리 불신임안 부결
영국 내각의 협의와 동의를 거쳐 준비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비준안이 유럽의회에 상정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영국 정부는 브렉시트 합의안과 관련해 여전히 대내외적으로 지난한 난항을 겪고 있다. 합의문에 대해 날로 거세지는 영국 의회의 반발과 유럽연합의 재협상 불가 통보 등 여러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영국 정부는 결국 ‘노딜 브렉시트’ 비상계획 마련에 착수할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노딜 브렉시트는 영국이 아무런 협의 없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것으로, 사실상 영국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브렉시트의 형태다.
영국 의회의 브렉시트 합의안 표결을 하루 앞둔 12월10일, 테리사 메이 총리는 합의안이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국회 연설을 통해 브렉시트 합의안 투표를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 노동당 수장인 제레미 코빈은 이날 예정돼 있던 의회 표결이 취소되자 의장의 허가 아래 이튿날 브렉시트 관련 긴급 토론을 열었다. 코빈은 메이 총리가 유럽의회와 합의를 보지 못해 최종적으로 더 나은 방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다면, 브렉시트에 대한 권한을 국회로 넘겨 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메이가 이를 거부할 경우 총리직을 사퇴해야 한다고까지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메이 총리 직위 불신임안 다시 상정
영국 내 브렉시트 찬반 진영 인사들 또한 메이가 브렉시트 합의안 투표 결과에 대한 패배를 직감하고 의도적으로 투표를 연기한 거라고 지적했다. 12월17일 메이 총리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현재로서 다음 합의안 표결 날짜는 오는 1월 셋째 주가 될 예정이다.
합의안 투표 연기를 계기로,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 협상안과 지지부진한 태도에 실망한 보수당 일부 의원들의 성명 발표가 잇따랐다. 그리고 12월12일 메이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가 의회에서 진행됐다. 불신임 투표는 의회가 내각을 더 이상 신임하지 않을 경우 투표를 통해 새로운 내각과 국회를 새로 구성하는 것이다. 투표 결과, 메이는 불신임 반대 200표, 찬성 117표를 받아 압도적 표차로 불신임안을 부결시켰다. 투표 승리로 메이는 당 대표와 총리직을 유지하게 됐고 조기 총선을 진행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레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브렉시트까지 약 14주밖에 남지 않은 현 상황에서 표결을 늦추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끊임없이 비판하며 12월17일 다시 메이 총리의 총리 직위에 대한 불신임안을 상정했다. 그러나 이는 총리 개인에 대한 불신임 투표 제안으로, 총선 실시로 이어지는 효력을 갖지 않는다.
합의안 표결 연기 발표 이후 메이는 EU 정상회의에 참석하기에 앞서 독일로 넘어가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유럽 회원국들의 수장들과 만났다. 이들과 브렉시트 합의문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며 설득을 꾀했지만, 유럽의회는 “영국 측에 아무리 양보해도 영국 의회는 충분하지 않다고 할 것”이라며 합의문에 대한 더 이상의 재협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27개 EU 회원국들도 합의문에 대한 재협상은 불가하다고 경고했다. 현 협상안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영국 의회의 분위기를 고려해 볼 때, 합의문 수정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결국 협상안이 의회 표결을 통과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합의문 표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부분은 아일랜드와 영연방 소속 영토인 북아일랜드 사이 국경에 관한 논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메이 총리가 현재 의존하고 있는 보수당 내 브렉시트 강경파와 이번 투표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북아일랜드 지역 정당 민주통일당(Democratic Unionist Party·DUP)은 메이 총리가 구상한 합의문의 일부인 ‘백스톱 조항’에 반대하고 있다.
백스톱(Back stop) 합의 실패
백스톱은 브렉시트 이후 일정 기간 동안 지금과 같이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간 자유로운 왕래를 유지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다. 브렉시트 실행 후 영국은 2020년까지 EU 관세동맹을 유지하며 조속히 EU가 무역 합의를 체결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현 합의문에 따르면, 백스톱은 한 번 적용될 경우 영국과 EU가 모두 동의하지 않는 한 결코 종료될 수 없다. 백스톱의 종료 시기와 관련한 내용 역시 담겨 있지 않다.
이에 대해 브렉시트 강경파는 현 합의문에 따른 백스톱 적용 시, 영국이 아무 발언권 없이 무기한으로 EU 규정을 따라야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우려했다. EU 측은 북아일랜드만 유럽 관세동맹에 머물게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메이 총리는 “이는 영국 연방의 헌법적 통합성을 위협하는 일”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EU가 합의안 재협상을 거절한 가운데, 메이 총리의 협상안이 결국 부결된다면 영국에 주어질 선택지는 노딜 브렉시트, 그리고 국민투표 이 두 가지뿐이다.
유럽헌법재판소가 “영국이 기타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동의 없이도 브렉시트를 철회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 가운데, 영국 내에서는 국민투표를 다시 하자는 목소리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메이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꺾지 않고 있다. 그는 이번 합의안이 2016년 국민투표의 뜻을 반영한 것이며, 국회 역할 또한 투표 결과에 담긴 국민의 뜻을 고려해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민투표 외에도 총선을 통한 새 정부 구성, 합의안에 대한 재투표 또는 EU와의 합의안 재협상 등 옵션은 더 있다. 그러나 오는 1월 투표 이후 브렉시트가 발효되기까지의 기간이나 현재 EU의 단호한 재협상 반대 입장 등을 고려할 때, 메이가 이 세 가지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할 확률은 매우 낮다.
현재로서는 많은 변수들로 인해 브렉시트가 어느 방향으로 진행될지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노딜 브렉시트로 진행될 가능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영국 정부와 EU는 이에 대비한 긴급 대책을 조금씩 마련하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브렉시트 비상기금 20억 파운드(약 2조8450억원)가량을 각 정부 부처에 투입하고 3500여 명의 군 병력을 비상 대기시키도록 결정했다. 또한 14만여 개의 기업에 노딜 브렉시트 지침서도 배포할 계획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영국 내 지속되는 불확실한 상황을 고려해 노딜 브렉시트 비상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그 결과로 최근 항공운송, 세관, 금융, 기후조약 등 다양한 부문에 대한 14개 대책 조항을 발표하기도 했다.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각 분야 전문가들의 우려 높은 목소리도 더욱 쏟아지고 있다. 마이클 고부 영국 환경식품농무부 장관은 “노딜 브렉시트가 진행된다면 영국 내 식료품 가격 상승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했다. 영국 상공협의회(BCC), 산업연맹(CBI), 소기업연맹(FSB) 등 역시 공동 성명을 발표해 노딜 브렉시트에 대한 우려와 빠른 합의문 타결을 촉구하며 메이 총리의 목을 더욱 조이고 있다.